[나는 백수다] 언론인 지망생의 글

'미래에 AI판사가 사형 판결을 내린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분석

by 호재

그렇다. 나는 언론인 지망생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차차 말하기로 하고, 오늘은 ‘미래에 AI판사가 사형 판결을 내린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쓴 한 편의 글을 실어보려 한다. 내가 이 글을 완성하기까지 공부하고 고민했던 부분들을 포함해서.


지난해 조선일보 공채 필기시험에서 나왔던 논제다. 시험을 봤지만 거창하게 말아먹었다. 논제를 받았을 때 헛웃음에 가까운 웃음이 났다. 머리는 하얘졌다.


신념이 있다면 비교적 수월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주제들이 있다. ‘지역화폐법’에 대한 논의라든가, ‘상법 개정안’이라든가. ‘저성장 대응방안’과 ‘남북관계의 방향성’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효율과 형평, 자유주의와 개입주의, 현실주의와 이상주의와 같은 대립항 가운데 더 ‘그럴듯한’ 이념을 잡아 글을 전개하면 된다. 능력이 된다면 두 이념 스펙트럼의 극단이 아닌 비교적 중도적인 시각을 논점으로 취할 수도 있다. 제3의 개념을 끌어와 글을 ‘직조’ 해도 된다.


(물론 나는 신념을 가져보려다가 실패한 사람으로서 하나의 이념을 취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래서 글을 쓰려면 남들보다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백수가 된 것 같다.)


AI판사 논제는 다르다. 신념을 통해 글을 써내려 갈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신념이 있다면 ‘인간에 대한 믿음’ 따위가 될 텐데, 이러한 부분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논제를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인간과 AI의 차이는 무엇이지? 공통점이 있다면 어떤 부분 때문에 AI판사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으며, 차이점이 있다면 AI판사가 인간을 대체하지 못할 치명적인 근거가 되는가? 이러한 물음이 꼬리를 문다.


고민 후에는 1천 자 분량의 글을 써야 한다. 맞다. 오만가지 생각을 한 다음에 대략 1시간 내에 임팩트 있는 글을 쓰라는 것이다. 조건도 있다. 정확하게 물어본 바에 대해 대답을 해야 한다. ‘사형 판결 수용 여부’에 대한 답변이 아니면 논지 이탈로 불합격이다. 최악의 논제다. 그래서 지난가을 즈음에 접한 이 논제를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다. 원수처럼. ‘지피지기’(知彼知己)에서 ‘지기’까지는 아니어도 ‘지피’의 단계는 꼭 거쳐야 할 것 같다. 다음의 분석이 그 결과다.


(논제) 미래에 AI판사가 사형 판결을 내린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가.


(1) AI판사⇔인간판사

AI의 핵심 기능은 학습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아직 답이 주어지지 않은 문제의 해답을 추론하는 것이다. AI의 이러한 특성을 ‘상관성’이라고 한다. 사전 데이터와 결론이 강력한 인과 관계로 묶어 있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관련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AI의 특징은 인간의 판단 과정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내일 해가 뜰 거라고 추론하지 않나. 과거 경험으로부터 인과적으로 도출해 낼 수 없는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외에도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등 AI와 인간 사이의 여러 공통점이 있겠지만 AI판사와 관련해서는 상관성 정도만 검토하면 될 듯하다.


이제 ‘판사란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고민해 볼 때다. 판사를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따라 AI판사가 인간판사를 대체할 수 있는지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난관이다. 판사가 무엇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막상 떠오르는 생각은 판사는 ‘법조문과 판례를 바탕으로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판사의 역할이 이 정도에서 그친다면 AI판사는 인간판사를 대체해 봄 직하다. 문제는 정말로 그러한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해 동성 부부 건강보험 피부양자 인정 판결처럼 ‘정의로운 판결’이 나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사례는 판사가 선례와 어긋나는 판결을 도출해 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AI판사가 이러한 지점까지 해낼 수 있을까.


“왜 법의 지배인가”(박은정)에 따르면, 판사의 역할에 대한 논의는 오랫동안 이뤄져 온 것 같다. 저자는 법에 관한 이론들을 검토하며 이에 의거해 재판관의 역할을 규정한다. 핵심은 ‘법은 과학이냐 가치냐’라는 질문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과학적인 법’을 주장하는 측에 따르면, 법은 그 자체로 ‘닫힌 체계’다. 법은 이행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당위와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 때문에 판사는 법을 있는 그대로 집행하면 된다. 이러한 이론에서 법은 반이데올로기적이고 반정파적인 것으로 표현되며 독립적이다.


이에 반대되는 이론은 ‘가치로서의 법’에 대해 주장한다. 미국의 법학자 로널드 드워킨이 내세웠으며 법 논의를 도덕과 정의 등 가치의 영역으로 확장한다. 드워킨에 따르면, 법을 과학적으로 보는 관점은 현실과 어긋난다. 실제로 법은 ‘해석’을 거쳐 실천돼 왔다. 개인과 집단의 권리 등 법 이외의 요소를 반영하는 식으로 사법 행위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해석을 최선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바로 판사의 역할이다.


판사와 관련해 이렇게 두 관점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인간판사를 AI판사로 대체할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관점은 과학적인 법을 주장하는 측(법=과학)과, 없을 거라고 보는 관점은 가치로서의 법을 주장하는 측(법=가치)과 상응한다. 판사에 대한 개략적인 개념 정의가 끝났다. 첫 번째 관문은 통과한 셈이다.


(2) 사형 판결

다음 단계에서는 사형 판결에 관해 논해야 한다. 논제에서 묻는 바는 AI판사에 대한 의견이 아니라 ‘AI판사가 내린 사형 판결’에 관해 묻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또 입장이 갈린다. 예를 들어 ‘법=과학’이라고 보는 입장을 취하더라도 사형 판결에 관해서는 찬성하지 않을 수 있다. AI판사든 인간판사든 사형은 다른 형벌과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도식화해 볼 수 있다.


①(AI판사≡인간판사)⇒사형 수용 가능

②(AI판사≡인간판사)⇒사형 수용 불가

③(AI판사≠인간판사)⇒사형 수용 가능

④(AI판사≠인간판사)⇒사형 수용 불가


①의 경우, AI판사와 인간판사는 닮았기 때문에 사형을 수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두 판사의 동질성 이외에도 ‘사법적 판단’의 중대함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 법치 국가의 시민으로서 사법부 권위에 복종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다. ②의 논리로 전개하려면 사형 제도의 부적합성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 인권이 보편화된 현시대에 사형을 선고하는 것 자체가 부적합하다는 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①과 ② 모두 첫 문단에서는 AI판사와 인간판사가 유사하다는 점을 보여주되 ①은 그다음 사법부의 권위와 그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논하고 ②는 그럼에도 사형은 인정할 수 없다는 식으로 논리를 구성하면 된다.


③의 경우를 주목해 볼 만한데 ‘AI판사는 인간판사와 다르므로 사형을 수용할 수 있다’라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AI판사가 인간판사보다 뛰어날 수 있는 지점에 있다는 논리다. 앞서 논의한 내용을 참고했을 때, 반정파성을 근거로 AI판사의 우수성을 내세울 수 있을 것 같다. 드워킨도 인정하지만, 판사의 판결에는 판사로서의 소신이나 신념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잡음이 발생한다. 법관이 진영 논리에 입각해 판결을 내리는 ‘사법의 정치화’ 현상이 이를 잘 보여준다. AI판사는 이러한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 듯하다. 물론 학습된 데이터에 따라 AI가 편향성을 띠는 문제를 거론하며 재반박할 수 있다. AI판사가 중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보일지라도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④는 AI판사는 인간판사와 다르며 이 때문에 사형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AI판사는 가치의 영역을 고려할 수 없다는 점을 보인 뒤 사형은 이러한 가치와 밀접한 형벌이라는 것을 밝히면 된다. 그리고 나는 이 관점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3) 함정: 미래

논제에 감추어진 함정이 있다. 시점이 ‘미래’로 불특정 하다는 것이다. 범용인공지능(AGI)을 넘는 수준의 AI가 개발돼 인간보다 월등한 수준의 사고를 갖는다면 어떨까. AI판사의 판결을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껄끄럽다. 우리의 ‘직관’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신호를 보낸다.

왜일까? 설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판결’은 ‘심판’이 아니다. 재판에 선 당사자가 판단의 결과를 수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당사자가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시민들이 대체로 납득할 만한 수준이어야 한다. 그럴 때 사법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고 ‘법에 의한 지배’가 가능해진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다음과 같은 어설픈 글이 나왔다. ④+(3)의 관점을 취했다고 보면 된다. 당연히 시험장에서 썼던 터무니없는 글에 비하면 조금은 나아졌겠지만 여전히 아쉽다.


일반적으로 판사는 법조문과 판례 등을 참고해 문제 사안을 판단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판사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판사는 법을 적용할 때 해석하는 절차를 거치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처한 상황이나 나아가야 할 목표를 고려해 법과 사건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해 대법원에서는 동성 부부의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한 대법원 판결을 내렸다. 이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차별적이라고 판단했다.


AI판사는 주어진 데이터를 바탕으로 추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판사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하지만 공동체의 목표와 비전을 충분히 반영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럽다. 이는 가치와 관련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차별 금지를 통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과 같이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목표는 단순히 선례를 바탕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AI판사가 판결을 내렸다면 동성 부부와 관련한 대법원 판결은 나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 이를 인정했던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형 판결도 마찬가지다. AI판사는 사형을 둘러싼 가치를 고려하지 못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공고해지면서 인권이 보편화된 상황이다. 사형은 국가가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반민주적이고 반인권적인 요소가 존재한다. 인간판사에 의해 사형이 거의 선고되지 않는 이유다. 하지만 AI판사는 이를 고려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단순히 법조문과 선례를 바탕으로 판단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동체가 처한 맥락과 비전을 감안하지 못한 것이다. AI판사의 사형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다.


사회적 맥락과 공동체의 비전을 학습하고 고려해 판결을 내리는 AI판사가 개발될 수 있다고 반박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사형 판결을 수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판결은 ‘설득’ 작업을 포함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법원은 공판중심주의 등을 마련해 판결이 공정하고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AI판사가 이러한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기능상 AI는 자신이 추론한 과정을 명백히 설명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AI의 한계를 감안할 때, AI판사의 사형 판결은 수용할 수 없다.


주변에 조선일보 필기시험을 통과한 사람이 꽤나 있었다. 부러웠다. 부끄러웠다. 이 논제는 인문학적 소양을 본다고 생각했고 나는 학부 때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래서 수개월이 지난 지금도 ‘AI판사’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흡하지만 글 한 편을 이제야 완성했다. 숙원 사업을 대충은 해결한 셈이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고 더 정진해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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