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막한 ‘서브스턴스’ 비평을 곁들인
아마추어 수준에 그칠지라도, 영화 비평을 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흙반죽을 이용해 도자기를 성형하는 과정과 같다. 모호한 생각 덩어리를 구체적인 모양으로 빚는 행위다. 영화를 본 직후에는 뿌연 감상만 남는다. 집에 돌아올 때, 현관문을 닫을 때, 씻고 막 잠에 들려할 때, 일어나 아침밥을 먹을 때. 온종일 생각을 주무르고 다진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를 발견해 나가는 과정은 고난하다. 이 정도면 꽤 그럴듯한 비평문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빠르게 지나갔던 장면이 문득 떠오른다. 이 장면에 대한 해석을 넣지 않는다면 아쉬운 글이 될 것 같다. 감상을 다시 반죽하기 시작한다. 주제를 미세하게 조정한다. 이것만으로 부족하다면, 글을 뒤엎는다. 그렇게 하루 정도 고민하고 나면, 마침내 글을 써내려 갈 수 있게 된다.
엊그제 ‘서브스턴스’를 보고 어제 글을 썼다. 가제는 “‘누구에게 인정받을 것인가’라는 문제.“ ‘인정’이라는 주제로 영화를 해석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를 지닌다는 말로 글을 열었다. 이때 그 타자가 누구냐,라는 의문이 생긴다. 서브스턴스는 인정 이전에 ‘주체의 선택’이 선행한다고 말한다. 누구에게 인정받을 것인지는 개인이 선택한다는 것이다. 한 때 톱스타였지만 나이가 든 지금,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인정받고 싶은 대상을 여전히 ‘대중’으로 정했다. 막대한 부를 거머쥔 데다 중년의 나이임에도 에어로빅 쇼에 출연하는 이유다.
영화는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은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추상적인 존재의 인정을 바란다고 밝힌다. 타자가 아닌 ‘타자의 시선’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타자가 실질적으로 존재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엘리자베스의 분신인 수가 ‘카메라 앞’에서 에어로빅 쇼를 진행하면서도 성취감을 느끼는 모습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녀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촬영 현장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존감의 근거는 제작자가 통지한 시청자 수로부터 온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쇼를 시청하고 있을 거라는 감각, 즉 시선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문제는 인정을 받고 싶은 대상으로부터 거부당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는 ‘나이 듦’이 그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어 노화가 오면 인정받지 못하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두 가지다. 다른 대상에게 인정받기를 선택하든지, ‘더 나은’ 자신이 되든지.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를 이용해 분신인 수를 만들어 내는 것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영화는 자신을 변화시키는 법에 초점을 둔다.
변화를 통해 자신이 선택한 존재로부터 인정받는 일은 계속될 수 있다. 다만, 전제 조건이 있다. 스스로에 대한 인정이 동반돼야 한다. 영화는 엘리자베스와 수가 일주일씩 번갈아 살아가야 한다는 영화적 장치로 이를 표현한다. 수로 살아가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만큼, 엘리자베스로 생활하는 기간에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해야 한다. 이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스스로를 잃게 된다. 수가 엘리자베스의 체액을 뽑아내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간을 늘리는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처럼 자신을 해치는 과정은 파멸로 치닫게 된다. 엘리자베스를 살인하게 된 수가 ‘몬스트로 엘리자수’라는 분신을 낳고 자멸한 상황처럼 말이다.
요약하자면, 영화는 자신에 대한 인정과 타인으로부터 오는 인정이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다음은 영화를 본 후에 읽어본 비평이다.)
어제, 이 부분까지 글을 썼다. 오늘 쓴 글보다 좀 더 촘촘하고 부드러운 필치로. 서브스턴스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를 쓰던 도중 모니터에 검은색 사각형들이 층층이 생겼다. 갑자기 꺼졌다. 순식간이었다. 배터리 문제겠거니 했다. 10퍼센트 채 남지 않았다. 하던 작업을 멈추고 집으로 향했다. 충전기에 맥북을 연결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충전 단자가 문제일 거라고 생각했다. 곧장 맥북 수리 예약을 했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왕십리에 있는 수리 센터로 향했다.
맥북은 죽음을 선고받았다. 센터 직원은 메인보드가 고장 났다고 말했다. 고치려면 75만 원이 든다고 했는데 3년 전에 120만 원 돈을 주고 샀다. 수리해서 쓸지 새로 살지 고민했다. 맥북 안에 있던 자료들은 어차피 되살릴 수 없었다. 내용물만 달라진 맥북을 쓰느냐, 완전히 새로운 맥북을 쓰느냐의 문제였다. 오랜 기간 함께 했다. 프랑스와 독일도 다녀오고, 나주, 함양, 대구, 대전, 원주 등 온갖 지역을 같이 다녔다. 함부로 썼다. 제대로 구동조차 되지 않는 프리미어 프로를 통해 편집하기도 하고 내팽겨 친 건 일상적이었다. 나의 지식의 파편과 감정의 조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분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세계로부터 가끔씩 내팽개쳐지고 있다는 점도.
항상 그렇듯이 과거란 것은 거머쥐고 있을 때보다 우연히 찾아올 때 더욱 소중한 법이다. 향 냄새를 맡으면 어렸을 적이 떠오른다. 할머니는 쌀을 담아낸 대접에 향을 꽂고 성냥으로 불을 피워냈다. 이 쌀은 다시 못 먹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가수 이소라의 노래를 들으면 학창 시절이 생각난다. 고등학교 때였나, 늦은 밤 독서실에서 이소라의 ‘내 곁에서 사라지지 말아요’를 듣으며 어금니를 꽉 깨물고 울음을 참았던 기억이 있다. 왜 눈물이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그땐 슬펐나 보다. 여전히 향 내음을 맡고 이소라의 노래를 들으면 그때가 문득 생각난다. 삶을 끓이고 졸여내 원액만 남는다면 이러한 순간들로만 가득하지 않을까.
새 맥북을 사기로 결정했다. 수리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수령할 수 있고, 무엇보다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니까. 조금의 미련만 남겨둔 채 켜켜이 쌓여 있던 과거와 작별하고 진정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사라져 버린 자기소개서와 나의 글들, 대학과 대학원에 다니며 일궈왔던 자취들. 무덤조차 갖지 못한 과거. 아니, 과연 무덤이 필요한가,라는 생각. 그들은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나의 이곳저곳에 덕지덕지 덧발라져 있을 텐데. 가끔은 다시 소환할 수 없는 이전의 맥북에 담긴 기억을 아쉬워하겠으나 죽음이란 바로 그런 것 아니던가. 돌이킬 수 없이 드문드문 찾아오는 손님. 보내주기로 했다.
다만, 과거에 살포시 손을 얹은 채 글을 쓰며 살아가는 그 순간에 내가 언제나 머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