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다시, 노트북을 열고

딸 셋 아빠로 산다는

by HIPE


봄이 시작되는 3월,

드디어 메일함에 기다리던 소식이 도착했다.


'검토 중'이라는 희망고문 대신 '함께 진행하고 싶다'는 명확한 문장이 적힌 계약서였다.


프리랜서에게 새로운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킥오프(Kick-off) 미팅은,

단순히 일을 시작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다시 세상의 일원이 되어 나의 쓸모를 증명할 기회를 얻었다는 안도감이다.


화상 미팅 창에 띄워진 낯선 이들의 얼굴과 인사를 나누고,

프로젝트의 목표를 공유했다.

모니터 너머로 오가는 딱딱한 비즈니스 용어들이 오늘따라 유독 생동감 있게 들렸다.

한 달간의 정적이 흐르던 거실은 이제 다시 나의 치열한 작업실로 변모했다.


미팅을 마치고 노트북을 덮자,

거실 창으로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문득 며칠 전 도망치고 싶던 퇴근길이 떠올랐다.


그때 나를 붙잡았던 건 거창한 계약서가 아니라,

중2 막내가 건넨 투박한 문자 한 통과 아내가 쥐어준 짧은 손의 온기였다.


거실 구석에는 여전히 우리 가족의 전우애가 서린 매트리스가 놓여 있다.

밤마다 그 얇은 매트리스 위에 나란히 누워 서로의 숨소리를 확인하던 시간들이,

사실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버텨낼 체력이 되었음을 이제는 안다.


"아빠,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방에서 나온 막내가 냉장고 물을 마시며 툭 던진다.

예전 같으면 관심도 없었을 녀석이 이제는 내 얼굴 표정에서 '입금의 기운'을 읽어낼 만큼 자랐다.

사춘기의 날카로움이 깎여나간 자리에 들어앉은 건,

아빠의 하루를 살필 줄 아는 기특한 마음이었다.


"어, 오늘 계약했어. 이번 주말엔 맛있는 거 먹자."


내 대답에 녀석은 "오, 나 스테이크"라며 짧게 대꾸하고는 제 방으로 들어갔다.

닫히는 문소리가 예전처럼 단절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각자의 방에서 자기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을 아이들의 소란이 든든한 배경음악처럼 들렸다.


불안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프리랜서의 삶이란 늘 파도 위를 걷는 것과 같아서,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나는 또다시 메일함을 새로고침하며 초조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적어도 이 거실 매트리스 위에는 내가 넘어져도 받아줄 단단한 온기가 있고,

나의 재기를 믿어주는 세 사람의 시선이 머물고 있으니까.


행복은 대단한 성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친 하루 끝에 돌아와 쉴 수 있는 낡은 매트리스 한 장과 그 위에서 나누는 사소한 농담 속에 있었다.


지금의 삶이 지속된다는 것,

그리고 그 지속됨 속에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삶이다.

내일 아침이면 나는 다시 노트북을 열 것이다.

우리 가족의 세계를 지탱하는 이 거실의 바닥을 더욱 단단하게 다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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