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중2의 문법이 다정함으로

딸 셋 아빠로 산다는

by HIPE


프리랜서에게 휴대전화 진동은 양날의 검이다.


새로운 일거리의 예보일 때도 있지만,

대개는 마감 독촉이거나 기대했던 계약이 무산되었다는 비보일 때가 많다.

노트북 앞에 앉아 멍하니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가 지탱해야 할 다섯 식구의 무게가 손가락 끝에 걸린 듯 무겁게 느껴진다.


어느 날은 유독 그랬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프로젝트들 사이에서 기운이 다 빠져버린 오후였다.


가장이라는 이름표가 족쇄처럼 느껴져,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가는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르려 아파트 단지 벤치에 앉았을 때,

주머니 속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막내였다.


한때는 내 퇴근길 마중을 인생의 가장 큰 이벤트처럼 여기던 아이였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고 사춘기라는 터널에 진입하면서부터,

막내의 방 문턱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벽이 되었다.

문자는커녕 말 한마디 건네기도 조심스러웠던 시간들.

그런데 화면에 뜬 막내의 문자는 엉뚱하기 짝이 없었다.


"아빠 올 때 편의점에서 1+1 하는 젤리 좀 사다 줘. 내 방 책상 위에 둔 비타민이랑 바꿔 먹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춘기 중학생의 문법치고는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다정했다.

사실 녀석은 안다.

내가 젤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리고 요즘 내가 부쩍 힘이 빠져 있다는 것도.

녀석 나름대로는 아빠의 처진 어깨를 봤던 모양이다.

직접적인 위로는 쑥스러우니 '젤리 심부름'이라는 핑계를 빌려 나를 집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집에 들어서니 거실 소파 위에 막내의 가방이 툭 던져져 있었다.

평소 같으면 잔소리부터 나갔겠지만,

오늘은 그 풍경마저 반가웠다.


막내의 방문을 살짝 열자,

녀석은 이어폰을 낀 채 공부하는 척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책상 모퉁이에는 녀석이 아껴 먹던 비타민 두 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젤리 사 왔다. 책상에 둔다."

내 말에 녀석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어, 거기 둬"라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어폰 너머로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나는 놓치지 않았다.

아이들은 부모가 모르는 사이에 자신만의 속도로 터널을 통과한다.


뾰족한 가시를 세우며 세상과 벽을 쌓던 중학교 2학년 막내는,

어느새 아빠의 고단함을 살피고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해 있었다.

식탁 위에 놓인 비타민 두 알을 입에 넣었다.

시큼한 맛이 혀끝을 자극하자,

도망치고 싶던 마음이 어느덧 든든한 책임감으로 치환되었다.

그래, 이 녀석들이 자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도 나는 내일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야 한다.


사춘기가 끝나간다는 신호는 거창한 고백이 아니었다.

무심하게 툭 던진 문자 한 통,

그리고 아빠의 취향을 다시 궁금해하기 시작한 그 서툰 관심이면 충분했다.


오늘 밤, 거실 매트리스 위에 누워 막내의 방 쪽을 바라본다.


방문 틈새로 흘러나오는 작은 불빛이 오늘따라 유독 따뜻하다.

녀석의 성장이 나의 가장 큰 보너스이자,

내일을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계약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밤이다.


이전 19화18화. 거실의 매트리스는 우리를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