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거실의 매트리스는 우리를 알고 있다.

딸 셋 아빠로 산다는 것

by HIPE


프리랜서에게 3월은 희망의 달이기도 하지만, 잔인한 결산의 달이기도 하다.


겨울내 붙들고 있던 프로젝트들이 종료되고,

새로운 계약서는 아직 메일함에 도착하지 않았다.

'검토 중'이라는 말은 희망고문이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게 만든다.


아이들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간 저녁, 거실은 비로소 우리 부부의 차례가 된다.

나는 거실 구석에 세워진 매트리스를 끄집어냈다.

'탁~' 하고 바닥에 펴지는 소리가 오늘따라 무겁게 들렸다.

이 얇은 매트리스 한 장이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보호받는 유일한 영토처럼 느껴지는 밤이다.


아내는 말없이 빨래 바구니를 가져와 내 옆에 앉았다.

수건을 착착 접는 손길이 리드미컬하다.

나는 노트북을 덮고 아내의 옆얼굴을 보았다.

맞벌이인 아내도 요즘 회사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은근히 흘렸었다.


우리는 서로의 불안을 알면서도,

그 불안이 거실의 공기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도록 애써 모른 척한다.

"이번 달은... 조금 조용하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일이 없다'는 직접적인 고백 대신 '조용하다'는 완곡한 표현을 썼다.

아내는 수건 한 장을 다 접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들 어렵다니까. 우리만 그런 거 아니야."


아내는 내 불안의 급소를 정확히 알면서도, 그걸 비켜서서 위로를 건네는 기술이 있다.

그 위로는 화려하지 않다.

그저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연대감이면 충분하다.


거실은 사방이 뚫려 있어 소리가 잘 들린다.

큰딸의 방에서는 인강 강사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막내의 방에서는 여전히 영어 문장을 외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들은 우리에게 '책임'이라는 이름의 무게로 다가오지만,

동시에 우리가 왜 이 거실에서 버텨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애들 학원비는... 일단 챙겨뒀어."

내가 덧붙였다.


아빠로서의 마지막 자존심 같은 문장이었다.

아내는 내 손을 짧게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고생했어. 당신도 쉬어야지. 너무 자책하지 마."


그 한마디에 팽팽하게 당겨졌던 마음의 줄이 조금 느슨해졌다.

불경기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개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많지 않다.

그저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내일 다시 노트북을 열 체력을 남겨두는 것뿐.


우리는 거실 매트리스 위에 나란히 누웠다.

천장의 형광등을 끄고 무드등 하나만 켜두니 거실은 제법 아늑한 호텔과 같다.

방 안에서 들려오던 아이들의 소란도 잦아들고 어둠이 집을 덮으면,

비로소 우리는 부부로서 서로의 숨소리를 듣는다.


"당신, 오늘 프랜치토스트 맛있었어."

아내가 잠결인 듯 나직하게 말했다.

"애들도 좋아하더라. 당신 요리 실력이 늘어서 다행이야."


그 사소한 칭찬이 왜 그렇게 콧날을 시큰하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다.

돈을 많이 벌어다 주지 못하는 미안함이 계란물 듬뿍 묻힌 빵 한 조각에 녹아내린 기분이었다.

거실은 우리에게 단순히 자는 곳이 아니다.

세상의 거친 바람을 맞고 돌아와 서로의 상처를 조용히 핥아주는 치유의 공간이다.


방이 없어서 거실에 나온 게 아니라,

어쩌면 우리는 서로를 더 가까이에서 지탱하기 위해 이 개방된 공간을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일이면 다시 월말의 압박이 시작되겠지만,

오늘 밤만큼은 이 매트리스 위에서 안심하고 잠들고 싶다.

우리는 서로의 등을 맞대고 누웠다.


따뜻하다.


이 온기만 있다면, 어떻게든 다음 달도 굴러갈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도 아이들은 자라고 그들의 세계는 커가고 있다.

우리는 그 세계의 바닥을 지탱하는 거실 매트리스 위에서 조용히 내일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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