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 우리 방은 거실이다.

딸 셋 아빠로 산다는 것

by HIPE


우리 집에는 방이 세 개다.


방은 모두 딸들 것이다.


큰딸 방, 둘째 방, 막내 방.


그렇게 정한 건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어느 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그리서 아내와 나는
거실에서 산다.


거실은 늘 열려 있다.


낮에는 식탁이 있고,
저녁에는 소파가 있고,
밤에는 우리 침대가 된다.


하루에 한 번
거실의 용도가 바뀐다.


그 바뀌는 순간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다.


저녁이 끝나면
아내는 먼저 거실을 한 번 훑는다.


말은 하지 않는데
눈으로 확인한다.


오늘도 굴러갔는지.


나는 설거지를 하고,
아내는 빨래를 개고,
아이들은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방으로 들어가는 소리는
딸마다 다르다.


큰딸은 발소리가 느리고,
둘째는 조용하고,
막내는 꼭 한 번 더 나왔다 들어간다.


“물!”
“충전기!”
“아빠, 나 내일 뭐 입어?”


그 소리들이 지나가면
거실은 잠깐 비워진다.


비워진 거실에서
아내와 나는
이제 우리의 차례라는 걸 안다.


아내가 매트리스를 꺼낸다.


거실 한쪽에 세워 두었던 매트리스를
바닥에 펼치는 소리.


탁~ 하고 펴질 때
거실이 갑자기
‘방’이 된다.


나는 이불을 꺼내고,
아내는 베개를 꺼낸다.


우리는 늘 이렇게
하루를 마감한다.


아이들의 하루는 방으로 들어가고,
우리의 하루는 거실로 나온다.


막내 방에서 영어가 시작된다.


막내는 요즘 영어를 크게 외운다.


문을 닫아도
소리는 나온다.


I can do it!


그 소리를 들으면
거실이 더 집 같아진다.


큰딸 방에서는
휴대폰 화면이 한 번 반짝이고,
둘째 방에서는
조용히 책장 넘기는 소리가 난다.


각자의 방은
각자의 세계다.


그리고 거실은
그 세계들의 가운데다.


아내가 매트리스 위에 앉아
한숨처럼 웃었다.


“우리도 방이 있긴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이 우리 방이지.”


아내가 말했다.


“사람들이 들으면
좀 이상하다고 하겠다.”


나는 웃었다.


“이상한데… 익숙해.”


아내는 맞벌이라 늘 바쁘고,
나는 나대로 하루가 길다.


침대에 누워 이야기를 길게 할 힘이 없을 때도 많은데,


거실에 매트리스를 깔면
이상하게 말이 조금 나온다.


아내가 조용히 말한다.


“오늘은 어땠어.”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짧게 대답한다.


“그냥… 굴러갔지.”


아내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 말이
우리 부부의 인사 같다.


그때 큰딸 방문이 살짝 열렸다.


큰딸이 얼굴만 내밀었다.


“엄마 아빠… 자?”


엄마가 말했다.


“이제 자려고.”


큰딸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아주 가볍게 말했다.


“굿 나이트.”


그리고 문이 닫혔다.


큰딸은 늘 낙천적인 애인데
이런 순간엔
생각보다 다정하다.


둘째는 방문을 열고 얼굴만 내밀었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짧게 말했다.


“하이.”


엄마가 웃었다.


“지금 하이냐.”


둘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거실은… 항상 하이 상태.”


그리고 손만 흔들고
들어갔다.


막내는 방문을 열지도 않고
방 안에서 외쳤다.


Good night, family!


거실에 깔린 매트리스 위에서
엄마와 나는 눈을 마주쳤다.


이 집의 중심은
방이 아니라 거실인지도 모른다.


방은 아이들에게 내줬지만,
거실은 우리가 지킨다.


거실에서 자는 건
불편할 때도 있다.


허리가 아플 때도 있고,
아침에 일어나면 몸이 뻐근할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가끔
이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각자의 방에서 자라는 동안
우리는 거실에서
부부로 남는다.


매트리스를 깔고
이불을 덮는 그 단순한 동작이
하루를 정리해 준다.


불을 끄기 전,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그래도 괜찮지?”


나는 대답했다.


“응. 괜찮아.”


거실은 우리 방이다.


오늘도 아이들은 자라고
그들의 세계는 커가고 있다.


나는 그 세계들 사이
거실 한가운데서
조용히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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