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마라탕이 길을 잃었다.

딸 셋 아빠로 산다는 것

by HIPE


그날은
아이들이 알아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한 날이었다.


엄마는 야근 중이었고,
나는 밖에 있었다.


집에는 딸들만 있었다.


큰딸이 말했다.


“마라탕 먹자.”


둘째는 고개만 끄덕였다.
크게 나쁘지 않고 다른 의견이 없다는 의견이다.


막내는 방에서 영어를 외우다가
문만 열고 말했다.


Yes!


큰딸이 막내를 불렀다.

“막내야, 네가 배달시켜.”


막내는 그 말이 제일 신났다.


배달 앱을 켜고
손가락을 빨리 움직였다.


큰딸이 옆에서 말했다.

“주소 확인했지?”


막내가 당당하게 말했다.

“했지!”


둘째가 조용히 한 마디 했다.

“너무 빨리 주문한 거 같은데...”


큰딸이 말했다.

“그러긴 하는데... 너 제대로 한 거 맞지?”


막내는 웃었다.

“불안하지 마.
나 영어 공부해야 해.”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I can do it!


배달은 곧 도착 예정이었다.


큰딸은 소파에 누워
마라탕을 상상했고,
둘째는 식탁을 닦고
물컵을 세 개 꺼냈다.


그렇게만 보면
아주 평화로운 준비였다.


그런데 알림이 왔다.


‘배달 완료.’


큰딸이 벌떡 일어났다.


“왔어?”


문을 열었다.


없었다.


복도도 조용했다.


큰딸이 핸드폰 화면을 다시 봤다.


“어 왜 없지?”


둘째가 화면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 사진 있어.”


사진 속 문 앞에는
마라탕 봉지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문이
우리 집 문이 아니었다.


큰딸이 막내를 불렀다.

“막내야!”


막내가 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왜?”

“너 주소 어디로 해놨어?”


막내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우리 집.”

큰딸이 화면을 내밀었다.

“이게 우리 집이야?”


막내가 사진을 한참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어?”


둘째가 한 마디 했다.

“막내, 영어는 크게 하는데
주소는 작게 봤네.”


큰딸이 깊게 숨을 쉬었다.

“막내. 저장된 주소 뭐야.”

막내가 앱을 열고
주소를 읽었다.

“엄마 사무실…”


큰딸이 잠깐 멈췄다.

“엄마 사무실로 시킨 거야?”


막내는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예전에 엄마랑 같이 시킬 때
저장해 두었는데...”


큰딸은 잠깐 말이 안 나왔다.

둘째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지금 마라탕은... 엄마 야근을 응원하는 중.”


막내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한 번에 받지 못했고
몇 번 울린 뒤에
짧은 목소리로 받았다.

“왜?”


막내가 급하게 말했다.

“엄마… 나… 마라탕을…
엄마 회사로 보냈어…”


잠깐 정적이 흘렀다.


큰딸이 옆에서 말했다.

“엄마, 마라탕은… 괜찮아?”

엄마가 짧게 웃었다.

“마라탕은 괜찮고

엄마가 안 괜찮지.”


전화가 끝나고
집은 잠깐 조용해졌다.


마라탕은 없고,
물컵만 세 개 놓여 있었다.


큰딸이 말했다.

“우리 오늘… 그냥 라면 먹을까.”

둘째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면은 배달 안 해도 돼.”

막내가 방으로 들어가며
작게 말했다.

I’m sorry...


잠시 후

엄마에게 메시지가 왔다.


‘마라탕 찾았다.
너희는 라면 먹어.
엄마는 오늘 마라탕으로 야근한다.’


그날 밤

딸들은 라면을 끓여 먹었다.


완벽한 저녁은 아니었지만
이 집은 대개
이렇게 굴러간다.


조금 어설프고,
조금 웃기고,
그래도 결국 정리되는 방식으로.


오늘도 아이들은 자라고
그들의 세계는 커가고 있다.


큰딸과 둘째는

라면 냄비 앞에서
잠깐 같은 편이 되었다.


그 정도면
오늘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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