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셋 아빠로 산다는 것
저녁 식탁은 대개
하루의 끝이 아니라
하루의 정산이다.
누가 먼저 앉는지,
어떤 표정으로 밥을 뜨는지,
말이 어디서부터 날카로워지는지.
그날도 그랬다.
큰딸은 먼저 와서
식탁 끝에 앉았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물부터 마셨다.
큰딸의 정산은 늘 이렇다.
말보다 먼저
숨을 고르는 것.
둘째는 그 반대편에 앉았다.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고
반찬을 한 번 훑었다.
둘째의 정산은 조용하다.
표정이 아니라
순서로 드러난다.
둘은 친하지 않다.
싸우는 사이는 아닌데
붙어 있으면 어색한 사이.
말을 안 해서가 아니라
말이 닿는 방식이 다르다.
큰딸은 세상을 가볍게 넘기고,
둘째는 세상을 조용히 정리한다.
같은 집에 사는데
대화는 자주 같은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막내는 그 사이를
대체로 신경 쓰지 않는다.
막내는 요즘 영어 공부를 한다.
그런데 조용히 하지 않는다.
막내의 영어는
서당에서 들리던 소리와 같다.
문을 닫아도
집 전체에 울린다.
“I can do it.”
“I can do it.”
한 문장을 열 번쯤 외우면
막내는 스스로 감동한다.
그 감동이
볼륨으로 나온다.
큰딸이 젓가락을 들고 말했다.
“막내야, 좀 조용히…”
막내가 방문 밖으로 얼굴만 내밀었다.
“언니, 영어는 원래 크게 해야 발음 좋아져.”
둘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네 생각이고.”
막내는 당당하게 외쳤다.
“That’s my opinion.”
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식탁에 웃음이 한 번 들어오면
조금 더 가벼워진다.
큰딸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아빠, 나 오늘 마라탕 먹고 싶어.”
아이의 하루가 매웠다는 뜻이다.
둘째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난 매운 거 싫어.”
오늘은 자극이 싫다는...
둘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서로 반대말만 말한다.
나는 그 사이에서
밥을 한 숟가락 더 뜬다.
아빠는 자주
결정을 맡는다.
그리고 그 결정은
대개 누군가의 기분을 건드린다.
큰딸이 말했다.
“쟤는 맨날 싫대.”
둘째가 말했다.
“언니는 맨날 하고 싶은 것만 말해.”
여기서부터는
하루가 말끝에 붙는다.
쌓였던 피곤,
쌓였던 예민함,
쌓였던 ‘그냥 넘겼던 것’들이.
그때 막내가 방문에서 나와
식탁 옆에 섰다.
그리고 아주 큰소리로 말했다.
“Stop fighting!”
막내는 다시 말했다.
“We’re family.”
나는 그 말에
웃음이 터졌다.
큰딸도 피식 웃고,
둘째도 고개를 숙였다.
정산은
이렇게 끝나는 날이 있다.
누가 옳았는지로 끝나지 않고,
오늘을 접는 방식으로 끝나는 날.
저녁을 먹고
큰딸이 먼저 일어섰다.
둘째도 따라 일어섰다.
둘은 여전히 친하지 않다.
적어도 싸우지는 않는다.
막내가 내 옆에 와서 물었다.
“아빠, 나 오늘 영어 잘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집 전체가 다 들었어.”
막내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막내가 마지막으로 외쳤다.
“Good night, family!”
큰딸이 말했다.
“쟤는 진짜…”
둘째가 아주 작게 덧붙였다.
“그래도 귀엽긴 해.”
큰딸이 잠깐 멈췄다가 말했다.
“응. 그건 인정.”
오늘의 정산은
그걸로 충분했다.
부딪혔지만 웃었고,
엉켰지만 풀렸고,
각자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오늘도 아이들은 자라고
그들의 세계는 커가고 있다.
서로 다른 세계가
같은 집에 들어오면
가끔 부딪히고,
가끔 웃는다.
나는 그 사이에서
큰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대신 오늘 같은 밤을
조용히 한 번 더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