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장애물이었던, 그러나 내 아이에게 무기가 된
아이가 새로운 학교로 옮긴 후 가진 첫 학부모 상담. 긴장 섞인 마음으로 마주한 선생님은 뜻밖의 명쾌한 진단을 내놓으셨다.
"아이가 영어가 워낙 탄탄하게 받쳐주기 때문에, 수학만 잘 따라와 준다면 나머지 과목들은 계획대로 아주 수월하게 마칠 수 있을 겁니다."
그 한마디에 마음의 짐이 한결 가벼워졌다. 동시에 지난 10여 년간 '교육의 대세'를 거부하며 묵묵히 밀어붙였던 나만의 실험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받은 기분이었다. 이제 시작이고, 대단한 결과를 낸 것은 아니지만 시작의 시점에서 들고 있는 무기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확인받은 그런 기분이다. 사실 대단히 똑똑하거나 특출 난 것이 없는 평범한 아이 그리고 대단히 물려줄 것이 없는 부모로서 아이의 삶에서 무기하나 만들어주는 것이 우리 부부의 목표였다. 그 무기가 영어였고, 엄마인 나는 비록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지만 아이에게 학습적 퍼스트 랭귀지로 영어가 자리 잡게 하기 위해 태어나면서부터 부단히 도 노력을 해 왔다. 물론 국제학교라는 베이스를 갖게 된 것도 참 운이 좋은 아이이고 덕분에 내가 수고를 덜은 것도 많은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나름 엄마로서 시도해 보았던 독서중심의 교육을 간단히 글로써 나누어 보려 한다.
1st 랭귀지를 위한 과감한 희생
아이의 영어를 위해 나는 한글 학습을 잠시 뒤로 미루는 선택을 했다. 영어를 단순히 '외국어'가 아닌, 학습을 위한 완벽한 '제1언어' 구조로 습득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국 사람으로서 치러야 할 대가(국어 실력의 공백 등)는 졸업 후에 톡톡히 치르게 할 각오를 하고 내린, 나름의 전략적 희생이었다.
또한 유아기부터 11세까지 그 흔한 수학, 미술, 음악 교습도 일절 시키지 않았다. 학습이나 배움에 대해 혹여나 흥미를 잃을까, 거부감을 만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였다. 대신 그 모든 시간을 '영어 책 읽기'를 위한 저녁 시간으로 온전히 비워두었다. 자기 전에는 무조건 책을 읽는 습관을 들였다. (물론 자기주장이 강해진 12세 이후로는 지키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나를 닮아 12살 즈음 이렇게 말 안들을 줄 예견한 나는 무조건 어릴 때 습관과 틀을 잡고자 하였었다.)
정답이 없는 독서, 그리고 '큐레이션'의 기술
독서에 있어서는 철저히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했다. 같은 책을 20~30번 반복해서 읽든, 여러 책을 산만하게 갈아치우며 읽든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그저 아이가 즐겁게 책장을 넘기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기서 부모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책을 골라주는 기술'이었다. 아이가 어떤 소재에 눈을 반짝이는지, 어떤 문체를 좋아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실패를 거듭했다. 그렇게 아이의 취향을 해독해 가며 한 권씩, 때로는 한 시리즈씩 책장을 채워나갔었다.
문해력, 중등 과정을 견디는 '공부 근육'이 되다
초등 과정에서 내가 집착한 것은 딱 하나, 바로 '문해력'이었다. 당장의 학교 점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언어를 읽고 이해하는 힘만 있다면, 지식은 언제든 채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세컨더리(중등 과정)에 진입하자 그 저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기 속도에 맞게 스스로 공부해야 하는 새로운 학교로의 이동을 과감히 결정할 수 있었던 용기도, 결국 아이의 탄탄한 문해력이 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속도는 문해력에 달렸기에 아이가 읽어낸 책들과 그 시간들을 믿고 이 학교에 오기로 아이와 합의 하에 결정하게 된 것이다. 아이 자신 역시 수학 외의 과목에서는 스스로 공부하는 것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가 다양한 과목의 내용들을 읽어 내려갈 때의 부담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든다. 마치 근육들이 잘 다져져 운동을 잘하게 되듯 그 간의 독서 경력이 공부근육을 받쳐 주고 있는 듯하다.
결국, 독서가 정답인 이유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돌이켜보면, 똑같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어도 유독 책을 많이 읽었던 친구의 점수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모든 조건이 비슷해도 결정적인 순간에 격차를 만드는 것은 결국 문해력이었다.
한 유명 일타강사도 성적을 올리기 위해 방학 내내 미친 듯이 책만 읽었더니 다음 학기 성적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경험담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공부하든 외국에서 영어로 공부하든, 언어의 그릇을 키우는 '다독'은 공부를 한결 가볍게 만들어주는 자명한 진리다.
아이들이 책을 많이 읽는 것은 모든 부모의 이상적인 바람이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부모의 다방면적인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때로는 남들 다 하는 학원을 포기해야 하고, 때로는 아이의 산만한 독서 습관을 묵묵히 지켜봐 주어야 하고, 내가 고른 책을 쳐다도 보지 않을 때의 속상함도 견뎌야 하며, 귀찮아도 함께 책을 읽어줘야 할 때도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중등 학습의 결과와 직면해 보니 더욱 명확해지고 있다. 책은 배신하지 않으며, 문해력은 아이가 평생 휘두를 수 있는 가장 날카롭고 단단한 무기가 된다는 것을. 아이의 날개가 되어준 이 언어의 힘이, 앞으로 공부를 해 나가거나 일을 할 때도 물러나지 않고 잘 버텨줄 수 있는 힘이 되길 바라본다. 또한 이 글을 읽으시는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님들이 흔들리지 않고 교육에 책을 잘 활용하실 수 있는 작은 정보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