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
만약 내가 창조자, 혹은 창조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피조물이라면 그들이 나에게 유일하게 주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인내가 분명할 것이다.
나는 종종 나 자신을 보며 의문을 갖는다.
과연 나의 지능 안에 [인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는 하는가?
그만큼 나는, 참을성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나는 살아오면서 의도치 않게 발생한 돌발적인 상황들에 대해서 질질 끌지 않게 되었다.
기회는 오직 한 번.
한 번은 있어도, 두 번은 없다.
이 가치관은 내가 인생의 철칙으로 삼아온 것이다.
그리고 나는 철칙 같은 내가 정한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지금까지 줄곧 노력해 왔다. 살아오면서 나는 수없이 많은 돌발 상황을 맞이했었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를 분명히 깨달았다.
상황을 질질 끌수록, 더 피곤한 또 다른 문제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사실이었다.
애매한 상태로 이어지는 상황일수록 이상할 만큼 사람의 감정을 소모시켰고, 그와 얽힌 인간관계들은 내 의도와는 다르게 극단적으로 왜곡되었다.
그렇게 다른 문제를 데리고 돌아오며 나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확실하고 빠르게 끝내지 않으면 돌발 상황은 끝나지 않는다. 형태만 바꿔 다시 다가올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상황에 놓일수록 나는 더욱 갈피를 잡지 못했었다. 과거의 나는 그렇게 마음이 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반복될수록 나는 스스로 빠르게 맺고 끝은 방법을 터득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확실하게 맺고, 끝내는 법. 그것은 삶을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 기술을 갖고 있지 못했고, 여러 번의 경험을 거치며 비로소 그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내가 결단을 빨리 내릴수록 상황은 그만큼 빠르게 정리된다. 그리고 정리가 빨리되는 만큼 서로에게 누적되는 스트레스도 그만큼 줄어든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면, 이 모든 것이 지금 내가 서 있는 상황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제 파악 9]과 관련된 이야기다 그동안 다들 눈치껏 각자 알아서 없는 일을 만들어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다 이번 주, 갑자기 물량이 늘었다. 영업의 성과라기보다는 대기업이 물량을 발주 과정에서 납기 계산을 잘못한 결과에 가까웠다. 예를 들면 보통 일주일을 잡고 발주하던 물량을 이번에는 절반의 기간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결과는 뻔했다.
갑작스러운 발주, 촉박한 납기, 그리고 야근. 문제는 내가 현재 척추 문제로 회복 중이라는 점이었다.
감사하게도 걷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지만, 뛰는 것은 아직은 불가능하다 , 그래서 아직도 무리하지 않으면서 회복에 집중해야 하는 상태다.
그런 상태에서 야근이 이어졌다.
아픈 상태로 일하다가 정말 통증이 심해 쉬게 되었고,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결국 야근, 특근, 수당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말없이 퇴근했고,
퇴근하면서 구직 사이트를 통해 동종 업계에 지원서를 넣었다.
떨어질 가능성은 크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이미 회사에 대한 마음이 떠났다는 사실이 더 분명했다. 이 물량은 지속적인 것도 아니다.
이번 급한 발주를 처리하고 나면 다시 눈치를 보며 할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미 허리 문제로 쉬는 것조차 문제가 된 이상, 자존심은 충분히 상했고 계속 다니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리고 이번에 직장에서 생긴 문제는 대화로 풀 수 있는 선을 넘었다.
이미 나는 일할 시간에 일은 하지 않고 논다는 사람으로 찍혀버린 상태다. 이것만으로도 대화로 풀 문제는 넘어 선 것이다
.
할 만큼 했다.
이제는 끝낼 차례다.
어쩌면 이 회사에서 이미 충분히 운명의 결실을 맺었으니, 이제는 또 다른 운명과 이어져 그곳에서 다시
새로운 운명의 결실을 맺으라는 인연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두 군데 중 한 군데는 분명히 출근이 잡힐 것 같다.
동종업계에서 해양판금 용접사는 희귀할 만큼 귀한 존재고, 나는 경력자다. 구인을 하는 회사에서 마다 할 이유가 없는 필요한 인재다.
지금 직장에서는 어차피 누군가는 나가야 할 만큼 상황이 절박하다. 그게 내가 되었을 뿐이다. 나머지는 이제 내가 떠나게 될 회사가 알아서 할 문제다.
알아서 하겠지.
그나저나, 이번에 새롭게 이어질 운명으로 이어질 인연의 연장선은 어떤 형태로 다가올지 조금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