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동태, 능동태
현장 노가다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의 종류는 결국 두 가지밖에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능동태적인 사람과 수동태적인 사람.
능동태적인 사람은 지시를 기다리지 않는다. 마치 시대를 앞서 개발된 고성능 인공지능 칩을 뇌에 장착이라도 한 것처럼, 아무도 보지 않는 일까지 먼저 발견하고 몸이 생각보다 앞서 움직인다. 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현장은 어느새 그들의 거미줄이 된다.
문제가 걸리는 순간, 거미가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향해 다가가듯 망설임 없이 움직인다. 그리고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처리하듯 일거리는 단숨에 사라진다. 잔혹할 정도로 빠르고, 냉정할 만큼 정확하게.
반대로 수동태적인 사람들은 함께 일하는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시대에서 이미 도태되어 사라져야 할 기계처럼 일일이 버튼을 눌러줘야 움직이는 아날로그 기계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늘 기준선을 계산한다. 이 정도만 해도 되는지, 이건 내 일이 맞는지, 굳이 지금 해야 하는지. 그래서 의욕이 마르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일은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그들이 있든 없든 성과에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문제는 그런 수동태적인 사람들이 처리하지 못한 일은 당연히 내가 대신 처리를 해야 되는 상황도 올 수도 있다. 그래서 수동태적인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다 보면, 장갑을 짚어 던지고 싶어 지는 게 한두 번 겪는 게 아니다.
만약 언젠가 기업들이 현장을 기계와 로봇으로 채우게 된다면,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모든 일에 자신의 노동력을 저울질하며 움직이는 수동태적인 성향의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라며 그들에게 탓을 돌리고 싶어질 정도다.
현장에서 수동태적인 사람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그들은 일의 무게보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부담을 먼저 계산한다. 그 계산은 언제나 정확하지만, 현장은 그 계산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문제는 그 영향이 그들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까지 서서히 병들게 만든다.
적어도 나는 현장에서 일을 하며 그들을 보면서 그런 가치관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에게 주어진 일조차 누군가는 해야 하고, 그 누군가는 대부분 나라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국 노동자라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당장 필요한 돈조차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들 중 일부는 노동에 기대어 살아가면서도 노동을 비웃고, 노동의 가치를 평가 절하한다.
먹고사는 기반을 부정한 채 그 위에 올라서 있으려는 태도. 어떤 시각으로 보더라도 정상이라 부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런 비정상적인 성향과 가치관을 끝내 버리지 않은 채 살아가려 한다.
그래서 나는 수동태적인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존경스럽다는 생각도 가지게 된다. 저렇게도 살아갈 수도 있구나 하면서. 물론 수동태적인 사람들이 현명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한다. 왜냐하면, 일을 적게 하면서 돈은 똑같이 받아가니까.
어차피 그만두거나 권고사직을 당하거나 그전까지는 출근을 해야 하고 출근을 하면 월급은 나온다. 그리고 업무에 대한 성과가 높든 적든 어차피 근로 계약서에 명시된 월급 받게 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나도 요즘은 고민을 하게 된다. 나도 수동태적인 사람처럼 대충대충 하면서 월급이나 루팡 해볼까 하고.
요즘은 후회가 된다. 왜 나는 수동태적인 사람처럼 되지 못했을까? 어영부영, 설렁설렁, 몸도 마음도 사리면서
시간만 때우다 받은 월급으로 사는 삶을.
그게 왜 나한테는 끝내 허락되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한번 해봐? 근로계약서에 서명도 했는데?
근데 그러면 사장님이 가만 두지는 않을 거 같다. 그래 이것도 팔자인거지. 늙어 죽을 때까지 수동태적인 사람들처럼 팔자 좋게 어영부영 일하면서 돈 벌어다 쓸 팔자는 아닌가 보다.
젠장.
죽어서 다시 태어날 기회가 있다면 수동태적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