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
얼마 전에 부산에 눈이 내렸다.
오전에 그것도 아주 오랜만에 잠깐 내렸다.
역시 부산이라 그런지 폭설 수준의 눈이 내리는 것을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비가 올 거라더니 비 대신 내리는 눈을 보면서 과거를 떠올렸다.
겨울이었다. 내가 대기업의 하청 노동자로 파견직을 가게 되고 거기서 8살 연상이었던 누나(와이프)와 캔커피 하나로 연애를 시작하게 된 이후였다.
부산이라 눈 구경은 거의 불 가능에 가까웠지만, 창원이었기에 부산에서는 볼 수 없는 폭설을 질리도록 볼 수 있었다. 일을 하는데 갑자기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내리기 시작하는 폭설을 신기하게 쳐다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부산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라 신기해서 처다 볼 수밖에 없었다. 내리는 눈을 처다 보다가 누나한테 문자를 보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이 하얀 눈 같으면 좋겠어]
그리고 그 이후로 나에 대한 와이프의 태도가 바뀌게 되었다.
솔직히 자기보다 8살 어린 연하 남자한테 대시를 받고 연애 아닌 연애를 시작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8살 어린 어린애한테 무슨 매력을 느꼈을까?
그래서 와이프는 종종 나한테 말했었다.
[정 때문에 만나주는 거다]
이 말을 괜히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자를 보낸 이후로 8살 연상인 누나와의 진지한 연애가 시작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자기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남자에게 대시를 받고 연애 아닌 연애를 시작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 역시 알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누나에게 있어 나는 [여덟 살 어린 남자]이라는 것을.
그녀가 내게서 어떤 매력을 느꼈겠는가? 그래서 지금은 아내지만,
그때는 여덟 살 연상의 누나였던 그녀가 [정 때문에 만나주는 거다]라는 말에 그렇게 크게 상처를 받거나 자존심이 상하거나 화가 나지는 않았다.
나보다 더 많이 살아본 사람의 현실적인 판단이었고, 어쩌면 나를 향한 최소한의 배려이며 존중이었을 거다.
그런데 그 눈 내리던 날, 그 문자 한 통 이후로 그녀의 태도가 달라지게 된 것이다.
사실 나는 그전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다.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 눈처럼 맑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그런 생각들은 예전부터 혼자 품고 있던 것들이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괜히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까 봐, 그리고 쓸데없이 감상적인 사람으로 보일까 봐. 하지만, 그녀에게만큼은 숨기고 싶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보다, 그냥 내가 진짜로 생각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그녀에게 있어 여덟 살 어린 남자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순간이 된 것이다.
그 문자 한 통이 그렇게 큰 가치가 있었겠냐마는, 말투가 미묘하게 부드러워졌고, 나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라,
조금은 생각이 있는 사람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 동안 이어진 연애는 딸이 생기면서 결혼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글을 쓰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가끔, 아니 사실은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하얀 눈처럼 조금만 더 선해졌으면 좋겠다고. 당장은 불가능하더라도, 그렇게만 된다면, 언젠가는 이 세계가 조금은 평화로운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하고.
물론 안다.
오는 데는 순서가 있어도,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는 말처럼 나도 우리도 언제든ㅈ 예고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고작 21그램짜리 하찮은 피조물 따위가 아무리 간절히 바란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내 바람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것도
그래서 지금은 그냥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보고, 듣고, 느끼며 우리 딸을 위해서 내 몫의 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그래도 가끔은 눈이 내리면 아직은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한 나를 발견한다.
참으로 같잖고 하찮지 않은가? 정말 주제파악은 눈곱만치도 하지 못하고 아직도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에 매달리며 살아가는 나라는 21그램은 정말 현실을 마주 볼 줄 모르는 병신이라는 거다. 그러니 이따위로 뜬 구름이나 쫓으며 살다가 죽을 수밖에.
그래서 세상을 보고 느끼는 마음이 항상 괴롭다. 이 정도면 주제파악을 하고 현실을 바로 마주 할 법도 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분쟁이 없는 세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항상 간절히 바라고 있다. 뭐 이렇게 살다가 명줄이 다하면 죽어버리면 그만이겠지 그것이 나라는 21그램의 인생 아닐까?
그래도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죽음을 앞두고 있을 미래의 나도 언제나 변함은 없을 거다.
언제나 나는 변함없이 이 세상이 분쟁 없는 세상을 맞이하게 되기를.
그것이 내가 첫 작품을 썼던 목적과 목표였고 앞으로도 그 목적과 목표를 위해서 글은 계속 쓸 테니까.
언젠가는 이 세상이 분쟁 없는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안다.
그것 불가능한 이상이라는 것을 그래도 나는 간절하게 바란다. 한 소녀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또 평화를 사랑하는 인간이며 또한 21그램이니까.
하지만, 왜 그런 분쟁 없는 세상이 맞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이상으로만 단정 지어야만 하는 현실과 사실을 이제는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는 해야 하지만, 그래도 쉽지는 않다.
이것도 주제파악을 못하기 때문이겠지.
나는 그런 하찮은 21그램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