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파악 30

커피

by 가비

“아빠는 엄마 어떻게 꼬셨어요?”


우리 가족은 언제부턴가 조금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물론 이 버릇은 와이프와 내가 연애를 시작했을 때부터 생긴 버릇이다.

외식을 하고 나면 계산은 늘 와이프의 몫이고, 딸과 나는 먼저 식당을 나온다. 물론 이 것은 와이프와 연애할 때도 내가 했던 행동이다 식사를 다하고 나면 와이프한테 현금이나 카드를 던져주고 나는 먼저 식당을 나왔다.


와이프가 계산을 하는 동안, 딸이 나한테 던진 질문이었다.


딸의 질문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흘러나왔다. 계산대 앞에 서 있는 와이프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리 부부의 연애는 거창한 사연이나 운명처럼 시작되었다. 더 자세히 말을 하자면, 나의 호기심과 장난에서 시작됐다.


나는 예전에 딱 한 번, 와이프에게 허락을 구한 적이 있다.


“우리 연애했던 이야기들, 글로 써볼까?”


질문을 던지자 와이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싸늘하게 얼어붙은 눈으로 나를 노려봤을 뿐이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는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정 때문에 너랑 만나 주는 거다.”


이 말은 3년 연애하는 동안, 와이프가 나에게 자주 상기시켜 주던 말이었다.


와이프와 내가 처음 만났던 때는 내가 25살이었다.


잘 다니던 환경 측정업체를 그만두고, 일주일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다가 갑자기 직장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5살이었는데도 직장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첫 직장도 내가 노력해서 구했던 직장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어렵게 어렵게 진짜 아주 어렵게 사람인과 워크넷 같은 구인구직 사이트를 알게 되었고 거기서 현장 직원을 구한다는 공고 하나를 발견하고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나는 창원에 있는 대기업 현장으로 파견됐다. 냉장고와 에어컨을 조립하는,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와이프를 처음 봤다.


솔직히 말하면, 서로의 이상형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늘 눈에 띄었다. 주변엔 항상 사람들이 있었고, 시끌벅적했고, 무엇보다 항상 밝게 웃고 있었다.


당당하고, 떳떳하고, 위풍당당한 모습. 그 모습에 괜히 마음이 쓰였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나는 저 여자를 한 번 꼬셔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말을 걸 용기는 없어서

그녀와 친해 보이던 키 큰 형님에게 슬쩍 물었다.


“저 여자 누구예요?”
“아, 누나?”
“누나요? 저랑 동갑인 줄 알았는데요.”
“너보다 8살 많아.”
“동안이네요.”
“그래서?”
“꼬시고 싶어서요.”
“커피라도 줘봐.”
“커피요?”
“저 누나 커피 진짜 좋아해.”


나는 그냥 진심은 아니었고 형의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캔 커피 하나를 사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렇게 연애가 시작되었다.

나는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와이프를 힐끔 보다가 딸에게 말했다.


“커피로 꼬셨어. 커피 주니까 따라오더라”

“정말요?”
“어.”
“장난이죠?”
“진짜야.”

"커피 주니까 따라오더라"

"거짓말"

딸은 끝까지 믿지 않았다. 이해는 갔다. 사실이지만, 믿기 어려운 이야기니까.

“아빠.”
“응?”
“어버이날 선물 해드리고 싶어요.”
“필요 없어.”
“왜요?”
“진짜로 필요 없어.”
“똥 닦을 휴지는 필요하잖아요.”
“그것도 짐이야.”

딸은 잠시 나를 보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안다.
내 딸은 한 번 마음먹은 일은, 상대 의사와 상관없이 실행에 옮기는 아이라는 걸.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내 딸은 한 가지 버릇이 있다. 이게 좋은 버릇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한번 마음먹은 건 상대가 좋든 싫든 실행에 옮겨 버린다. 딸이 아직 1월인데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저 말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부모님 어버이날 선물로 제가 무언가를 사드릴 건데 필요하든 아니든 사드리면 그냥 받으세요]


이미 딸은 나한테 미리 선전포고를 해놓는 거다 뭘 사드리든 받으라고 거절은 거절한다는 그런 느낌으로 이미 선전포고를 해버린 거다.


머릿속에서 지갑이 떠오르기는 했었다. 지갑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와이프랑 3년 연애하는 동안 와이프가 나한테 딱 한번 선물을 해준 적이 있기는 했는데.


그게 지갑이었다.


왜냐하면, 항상 데이트를 하고 나면 식사를 하고 계산을 하면 내 주머니에서 나오는 건 카드&정리가 되지 않아서 구겨질 대로 구겨진 종이 쪼가리 현금이었기 때문이다.


근데 와이프는 정말 커피를 좋아한다.

오늘 갔던 고급 음식점에서도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커피를 담기 위해 미리 텀블러를 챙겨 왔다.


딸과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딸과 내가 마셔야 했던 커피까지 전부 와이프는 미리 가져온 텀블러 안으로 콧노래를 부르면서 부어버렸다.


가끔씩은 저 정도면 병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물론, 그 병 덕분에 우리 딸이 태어났지만.


그리고 생각해 보니, 그 커피 덕분에 내가 글을 쓰게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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