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분노
한국은 흔히 [아시아의 화약고]라고 불린다.
이 표현은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국제 정세 속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그만큼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1차 한국전쟁이 끝난 이후, 동아시아는 단순한 휴전 상태로 남지 않았다. 복잡하게 얽힌 국제 질서 속에서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군사적 방어 체계, 다시 말해 보이지 않는 군사 경계선이 형성되었다. 이는 한국에서 또다시 전쟁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가능한 한 최대치의 안전장치였다.
이 방어막은 단지 한 국가를 지키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만약 이 균형이 무너진다면, 그 파장은 한반도를 넘어 아시아 전체, 나아가 인류 전체의 존립과도 직결될 수 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한국은 [아시아의 화약고]라는 특별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폭발하지 않기를 전제로 유지되는 긴장.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모두가 바라지만, 동시에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고 가정된 상태.
한국은 그렇게 세계 질서의 가장 불안정한 균형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은 어디까지나 바깥에서 바라본 한국의 얼굴이다. 지도 위의 한국, 뉴스 속의 한국, 국제회의 테이블 위에 놓인 한국이다.
안으로 들어오면 풍경은 전혀 다르다.
아침이 되면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출근 시간의 혼잡은 여전히 짜증스럽고, 커피값은 여전히 비싸다. 아이들은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배우기 전에 받아쓰기 시험부터 치른다. 이 나라의 긴장은 경보음이 아니라 배경음처럼 깔려 있다.
사람들은 묻지 않는다.
[오늘 전쟁이 날까?]
대신 다른 것을 묻는다.
[오늘은 비가 올까?], [이번 달 카드값은 얼마나 나올까?]
이것이 한국이 가진 가장 기이한 특성이다.
세계는 이곳을 화약고라 부르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화약을 의식하지 않은 채 하루를 산다. 위험을 부정하지도, 매일 두려움에 떨지도 않는다. 그저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삶의 조건 중 하나로 받아들일 뿐이다. 어차피 일어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나는 이 나라에서 가족을 지키는 가장이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아이가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내일을 생각한다. 그 순간 [국가 안보]나 [국제 질서] 같은 단어들은 갑자기 아주 개인적인 질문으로 변한다. 이 땅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추상적인 위험을 감수한다는 말이 아니라 위험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여전히 아시아의 화약고다.
그러나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집이고, 누군가에게는 고향이며,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할 일상의 공간이다. 폭발 가능성만으로 이 나라를 설명하기에는, 이 안에서 흘러가는 삶의 무게가 너무 크다.
나는, 굳이 이 글을 통해서 한국이 왜 위험한지를 설명하고 싶지 않다. 난 그만큼 똑똑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기록하려 한다.
위험하다고 불리는 장소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평범하게 살아가는지를.
하지만 1차 한국전쟁을 바탕으로 우뚝 서게 된 한국은 시간이 흐르며 다른 얼굴을 갖게 되었다. 수많은 목숨의 희생 위에 세워진 이 나라는 점차 부정부패로 얼룩진 구조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라를 지켜냈던 희생은 공동의 자산이 되지 못했고, 그 대가는 특정 기득권층과 권력층의 몫으로 집중되었다.
전쟁을 견뎌낸 국민들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권력은 점점 닫힌 공간 안에서 순환했다. 피로 지켜낸 국가는 어느 순간, 국민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권력을 가진 소수의 이해를 유지하는 시스템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실망이 아니라,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이었다.
참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이 땅은 너무 많은 희생을 치렀고, 그 희생의 무게는 지금의 모습과 쉽게 화해되지 않는다. 한국이 마주한 더러움은 외부의 위협이 아니라, 내부에서 만들어진 균열이었다.
그래서 한국이라는 나라는 이미 하나의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2200년 인구 300만 명이라는 전망은 갑자기 등장한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누적된 선택의 결과이자, 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에 대해 마음속으로 포기해 왔다는 신호에 가깝다.
사람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노력과 책임이 보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무너질 때, 개인은 가장 근본적인 선택부터 미룬다. 한국 사회에서 저출산은 개인의 이기심이 아니라, 구조에 대한 집단적 불신의 표현이 되었다.
반면, 한국을 이끌어가는 기득권층과 권력층은 다른 계산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정치적·경제적 메리트를 일시적인 성과가 아니라, 후손에게까지 이어질 권리로 고정시키려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개혁이 아니라, 질서의 유지다.
그 질서를 유지하는 가장 오래된 방법은 명확하다.
비기득권자들끼리 서로를 의심하게 만들고, 싸우게 만드는 것이다. 세대와 성별, 지역과 이념을 갈라놓고 갈등을 증폭시키는 전략은 새롭지 않다. 싸움이 아래에서 계속되는 동안, 위의 구조는 손대지 않아도 유지된다.
이 싸움은 자발적으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전략을 막기 위한 전략이자, 기득권을 영원히 독점하기 위한 전술이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은 언제나 비 기득권자라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누적된 구조적 부작용은 결국 하나의 사건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2025년 12월 3일, 한국에서 벌어진 일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 방치된 균열이 수면 위로 떠오른 순간이었다.
더 절망적인 장면은 그 이후였다.
계엄을 정당화하고, 권력의 언어를 대신 반복한 이들 중 상당수는 기득권자가 아니라 비기득권자들이었다. 억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 억압의 논리를 옹호하는 모습은, 같은 국민으로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아시아의 화약고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면서 인류의 미래가 완전하게 파괴될뻔한 사건이었다.
근데 비 기득권자들은 이 사건을 지지하고 옹호하고 정당화를 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단순한 무지나 오해로만 설명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것은 오래도록 학습된 결과에 가깝다. 권력은 언제나 자신을 직접 변호하지 않는다. 대신 그 언어를 누군가의 입에 쥐여준다.
불안한 사람들에게,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미 충분히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권력은 책임을 위임하고, 분노는 옆 사람을 향한다.
구조는 보이지 않게 되고, 서로를 적으로 인식한 개인들만 남는다. 이 과정에서 가장 잔인한 점은, 피해자가 가해의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한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억압할 수밖에 없는 체제를 방어하면서, 그 체제가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는 순간, 비극은 완성된다.
그래서 나는 이 장면을 인간의 어리석음으로만 치부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말해버리는 순간, 이 모든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오래 설계된 구조의 문제이며, 의도적으로 유지되어 온 불균형의 결과다.
동시에, 이것이 곧 인간의 본성이라고 단정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가 반복해 보여주듯, 권력은 언제나 가장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가장 쉽게 정당화되어 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 깨달음은 분노보다 먼저 절망을 불러온다.
싸움이 위에서 시작되었음에도, 아래에서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는 순간 변화의 가능성은 급격히 줄어든다. 나는 그 장면 앞에서 분노보다 깊은 좌절을 느꼈고, 그것이 이 글을 쓰게 만든 가장 직접적인 이유가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내 딸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현실감보다 먼저 소름이 돋는다. 그것은 막연한 불안이 아니라, 너무 구체적인 공포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더 화가 나고, 더 분노하게 된다.
이 분노는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다.
아버지로서 느끼는 책임감이자, 다음 세대에게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을 물려주고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아이는 아무 선택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선택된 구조 속으로 던져졌다. 그 사실이 나를 가장 격렬하게 흔든다.
나는 요즘 종종 나의 친어머니와 아버지를 원망한다. 왜 두 분은 만나서 사랑을 했고, 왜 하필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을까. 이 것은 단순한 투정이나 반항이 아니다. 살아오면서 겪은 현실과 사회의 구조, 그리고 그 안에서 소진되어 가는 나 자신을 바라볼수록, 그 원망은 점점 나의 친어머니와 아버지를 향하고 있다.
더 무서운 점은, 훗날 내 딸이 성장해 이 사회를 살아가다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붕괴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 분노의 대상이 결국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지금의 내가 부모를 원망하듯, 언젠가 딸이 나를 향해서 분노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다. 오히려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더 큰 축복이고 행복일 수도 있다. 선택권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기득권자와 특권층을 떠받치는 구조 속에서 평생을 소모하다 죽는 삶이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아이를 낳지 않기로 선택한 부모들이, 어쩌면 더 현명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불공평하고 불공정한 사회에서 원하지도 않았던 삶을 강요받으며, 영원한 노예처럼 살아가다 죽는 고리를, 최소한 자신의 세대에서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딸에게 이 세상이 공정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노력하면 나아질 수 있고, 옳은 선택이 결국 보상받는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 말을 확신에 차서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조차도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것이 지금의 한국에서 비기득권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가장 솔직한 얼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