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중국요릿집마다 있는 기본 메뉴 “짜장면”과 1882년 구식군대의 반란 (임오군란) 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인천 개항로와 차이나 타운을 지나면 1883년이라는 간판들이 자주 보인다. 그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140년 전 조선으로 한번 돌아가보자.
당시 전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으로 시끄러웠고 강대국 사이에 있던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청나라는 조선을 아직도 속국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권리를 계속 주장하고 있었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기반으로 새로운 제국주의국가로 세력을 점점 키워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러시아 또한 한반도를 포기하지 않고 야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편전쟁 패배 등으로 청나라의 위세는 예전과 같지 않았으나 조선에 대한 권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은 저런 청나라를 견제하면서 조선에서의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강화도조약(1876) 이후 조선에서의 일본세력의 힘을 점점 키워가던 중 조선의 구식군대 가 반란을 일으켰다. (1882 임오군란) 새로 창설된 일본식 별기군에 비해 대우가 안 좋았던 구식군대 군인들은 13개월째 밀린 월급으로 생계유지가 힘든 상황을 버텨나가고 있었는데 13개월 만에 받은 월급은 모래와 겨가 섞여 있는 그냥 먹기 힘든 쌀이었다.
군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군인들은 다 친일 민 씨 집안과 명성황후(민비)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일본공사관을 습격하고 일본인 교관을 살해하고 궁궐로 진입해서 민 씨 집안 고관들을 살해했다. 명성황후까지 죽이려고 진입했으나 명성황후는 피신해서 생존했다.
군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다시 불러들이고 군인들에게 밀린 월급을 지급하고 일본식 신식군대인 별기군도 폐지하고 5 군영을 부활시켜 난이 진압되는 듯했다. 하지만 명성황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민 씨 세력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고 구식 군인들이 살고 있는 거주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주동자를 처형했다. 청나라는 난의 주동자로 흥선대원군을 지목하고 텐진으로 압송해 가버렸다. (청나라는 “ 황제가 책봉한 조선의 왕에 대항한 것은 황제에 대항한 것이나 다름없다 ”는 논리로 흥선대원군을 납치했다. )
결국 명성황후(민비)는 다시 권력을 차지했으나 청나라를 끌어들인 대가는 매우 컸다. 청나라군대는 용산에 주둔했고 내정에 간섭했으면 불평등 조약을 강요했다. (이때부터 용산엔 외국군대가 주둔했다. 청-> 일본 -> 미국)
그리고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을 강요받았고 결국 청나라의 요구를 수용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란 말은 조선과 청나라 상인간 무역 규칙 이런 뜻인데 조약이라고 하지 않는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을 속국으로 이해했다. 즉 명력 규칙 이런 뜻이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제1조,북양대신과 조선 국왕의 위치를 대등하게 규정 (조선은 청의 속국이며 청의 신하과 조선의 왕은 대등)
제2조,조선에서의 중국 상무위원의 치외법권 인정
제3조,조난 구호 및 평안도⋅황해도와 산둥⋅봉천 연안 지방에서의 어업 허용
제4조, 베이징과 한성 양화진에서의 양국 상인 영업을 허락하되 양국 상민의 내륙 영업은 금지함을 원칙으로 하고, 불가피할 경우 해당 지방관의 허가서를 받아야 한다
제6조,홍삼 무역 세칙( 청국은 홍삼 무역에 대해 50%의 세금을 징수하고자 했으나 조선의 요구로 15%로 확정) 등이다.
1조는 조선을 청의 속국임을 명확히 해서 일본의 야욕을 분쇄하고자 한 청의 의도가 드러난다. (후일 청일전쟁으로 인한 시모노세키조약의 1조는 조선은 자주국가이다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는 조선은 청의 속국이 아니라는 일본의 의도가 담겨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전” 체결의 결과 조선에서 청의 치외법권이 인정되었으며 청의 상인은 허가를 받으면 개항장 밖에서도 상업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 때까지만 해도 외국인은 개항지 10리 이내에서만 활동을 할 수 있었으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전”으로 내지까지 활동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졌고, 일본 러시아 미국 등 열강들은 조선에 최혜국대우(나도 똑같이 최고 대우 해달라)를 요구했다. 결국 제국주의 열강들은 조선내지까지 경제적 침투를 하게 되었다. 1883년 일본을 선두로 인천은 각종 열강들의 조계지(치외법권을 누리는 반식민지 지역)로 나뉘었고 조선민중들은 항구로부터 밀려나고 외국인들의 도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인천은 식민지화되었고 다른 한 편으론 개항으로 인천은 국제도시화 되었다.
조선에 가면 자유롭게 상거래를 할 수 있게 된다는 소식을 들은 산둥지방 중국인들은 대거 인천으로 이주를 했다. 당시 중국도 민란과 외세에 의해 민중들은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조선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으로 들어왔고 이는 한국 화교의 기원이 된다. (1990년대 조사결과 한국 화교의 90프로가 산둥성출신)
이들이 인천항 인근 (현재의 차이나타운)에 처음으로 한국의 화교 공동체를 이루었고, 원래 산둥성의 가정식이었던 작장면을 1890년대 인천항의 중국인 부두 노동자들에게 팔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한국 짜장면의 시초가 되었다.
인천의 개항 이후에도 일본 러시아 청나라의 힘싸움은 지속되었고 1894년 청일전쟁으로 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잃고 1904년 러일전쟁으로 러시아도 조선에서 떠난 후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어떠한 조약도 총 칼 앞에는 무력하다는 역사의 교훈이 짜장면에 녹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