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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아픈 현대사

by 예주JUNG

2015년 말 한국의 마리텔이라는 프로그램에서 트와이스 쯔위가 청천백일기 ( 중화민국 국기)를 흔드는 모습을 황안(대만출신 중국 가수)의 폭로함으로써 중국 내에서 여론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트와이스는 출연예정이던 모든 프로에서 하차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 여론 자체가 점점 심각해져 쯔위가 속한 트와이스 외 JYP 엔터테인먼트의 다른 가수들의 활동도 취소 요청을 받는 보이콧 사태가 일어났다.

사태가 점점 악화되자 JYP는 2016년 1월 15일 쯔위가 직접 사과하는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린다.(https://www.youtube.com/watch?v=zsbnssD_aME) “나는 중국인으로서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으며.....”라고 말하는 이 동영상은 대만에도 공개가 되었고 그걸 본 대만인(본성인)들은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느끼게 된다. 대만인들은 항상 억압당하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하는 자신들의 삶을 투영해 보았던 것이다. (각주 본성인-대만인구의 84프로 정도 명청시대 건너온 섬사람들, 외성인-중국의 국공내전의 패배로 섬으로 들어온 국민당사람들 대만인구의 13프로 정도)

쯔위 동영상은 당시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던 대만 총통선거에도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고 결국 민진당(민주진보당) 차이잉원 이 압도적 표차로 국민당 주리룬을 젖히고 승리하게 만들게 된다. 무슨 연예인 하나의 동영상이 대만 총통선거에 영향을 미칠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복잡하게 꼬여있는 대만 현대사를 한번 돌아보자.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대만은 해방을 맞이했다. 대만은 1895년부터 일본의 식민지였으니 우리나라보다 무려 15년 더 일제치하에 있었다. 1895년 청일전쟁(동학농민운동 관련됨)으로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은 일본 통치하에 들어갔다. 그 이후 50여 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다가 일본의 패망으로 우리처럼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수도 타이베이에는 해방군을 맞이하기 위해 30여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왔고 일제로부터 해방시킨 영웅으로 소개되며 대륙에선 패잔병들이었던 국민당 군대가 ‘해방군’으로 들어오게 된다.( 타이베이 중정기념관에 사진도 있음)

새로이 대만을 통치하게 된 국민당 정부는 대만본성인들의 기대를 크게 배신하는 것이었다. 행정기관의 중추는 대륙사람들로 다 채워졌고 심지어 시골마을 교장선생님 보건소장까지 대륙사람들로 교체가 되었다. 기존에 관직에 일하는 섬사람들은 ‘친일매국노’로 탄압을 받았고 식민지 시대의 경제기구는 대만 민간인들에게 불하되지 않고 국민당이 접수해 버렸다. 그리고 당시 대만 섬사람들은 “일본어”나 대만어를 주로 사용했고 익숙했는데 “중국어”를 보급하여 일본어사용을 철저히 금지시키게 된다. 따라서 학교나 병원에선 중국어 강습이 유행하기도 했다. 육지사람들이 모든 권력기관을 장악하고 섬사람들의 불만은 점점 높아져 갔다. 외성인과 본성인 사이의 임금격차도 일제 강점기 그것의 몇 배가 되도록 커졌다.

이런 본성인들의 반감이나 불만이 응축되고 있던 시기에 발생한 것이 그 유명한 2.28 사건이다. 1947년 2월 27일 밤 타이베이에서 담배를 파는 노점상 여성과 탈세품을 적발하던 전매국 직원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는데 그 직원이 주위를 둘러싸고 항의하는 민중들을 향해 발포하여 한 명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다음날 지나치게 심한 단속에 반감을 품고 있던 민중들은 전매국에 몰려가 항의를 하고 타이완성 행정장관 집무실이 있는 건물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는데 경계를 맡고 있던 병사들이 발포하여 또 사상자가 나왔다. 감정이 격해진 민중들은 방송국을 습격하여 점거하고 타이완전역에 사건의 경위를 알리는 한편, 생환난에 항의하면서 관리의 부패를 규탄하고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사태는 섬전체로 확대가 되었고 이에 당황한 국민당군은 2개 사단을 본토로부터 불러들이고 대량 학살을 시작하게 된다. 대륙에서 패잔병이었던 국민당 군대는 섬에서는 학살자로 돌변해 시민들을 죽이고 약탈하기 시작하면서 섬전체는 피의 강물이 흘러내리게 된다.

3월 6일 대만 제2의 도시 가오슝 시청을 점거한 시민들을 향해서 국민당군이 포위 사격해서 수많은 사상자가 나기도 했다. 이러한 국민당 외성인의 탄압은 본성인들한테 엄청난 충격과 공포로 다가오게 된다. 대만 내 많은 젊은 지식청년들은 산으로 올라가 대만해방을 위한 빨치산 투쟁에 동참하게 된다.

3월 10일 국민당 정부는 계엄령을 발동하고 야간 통행금지를 시키게 된다. 눈에 띄는 섬사람은 보이는 즉시 사살하고 사건처리위원회 관계자라도 섬사람이라는 이유로 처형되기까지 한다.

이때 발동한 계엄령은 이후 40년이 지나서야 해제된다.(1987년 계엄령해제)

수적우위를 가지고 있던 본성인 들이었지만 1949년 대륙의 국공내전의 패전으로 물 믿듯이 밀려오는 국민당의 화력을 맨손으론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 결과 육지사람(외성인)과 섬사람(내성인) 사이에도 심각한 적대감정이 싹트게 되었다.

장제스와 그의 아들 장경국이 죽고 나서야 2.28이란 단어를 민중들이 꺼낼 수 있었다. 1988년 내성인 출신 최초의 총통 리등휘가 집권하자 2.28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시작했고 대만정부 통계로 2만 8천 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민간에선 10만 명이라고 발표) 대만 섬사람들한테는 2.28 사건과 관계가 없는 가족이 드물정도였다.

계엄통제 아래 대만진보운동은 반국민당, 반중국, 대만자체독립운동의 성격을 내포할 수밖에 없었던 토양아래 성장했다. 대륙출신 국민당지배보다 일제 강점기를 그리워하는 어른들이나 지식인들도 많아졌고 친일성향도 진보 쪽에서 강해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 황무지 같은 섬에 대학도 세워지고 철도도 세워지고 소득 수준도 높아졌다는 “일제 근대화론”이 내 성인들 사이에 뿌리 깊게 박히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대륙사람보다 합리적으로 잘 지배했다는 생각이 현대 대만인들 사이에도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다.

현재 민진당은 대만 본성인중심의 저항운동으로부터 시작된 정당으로서 대만자체의 독립을 원하고 있고 중국과는 별개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보면 국민당은 대만은 중국의 일부이며 중국역사의 일부이니 중국과 대만은 하나의 나라라는 생각을 기본 갖고 있다.

2000년 대만역사상 최초로 정권교체를 한 천수이벤은 본성인 출신이고 본성인 저항운동을 하던 인권변호사 출신이다. 하지만 천수이벤의 대만 독립운동에 대해 불만을 가진 대륙의 공산당은 국민당과 뜻을 같이해서 민진당을 탄압하고 제재하게 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적 보수언론 <인민일보>와 대만의 보수언론 이자 반공언론이언 던 <연합보>과 논조를 같이하고 있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대륙에서 이데올로기 전쟁을 치렀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현재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중국대륙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국민당과 공산당의 이데올로기 전쟁을 생각해 본다면 현재 대만 국민당의 친공산당 (공산당의 친국민당) 정책은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쯔위의 “중국은 하나이고 나는 중국인이다......”라는 동영상은 단순한 한 연예인의 사과가 아닌 대만 민중들의 가족과 현대사를 관통하는 억압받는 그들의 삶을 보여줬기 때문에 대만민중들은 분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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