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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의 의미

성리학적 세계관의 붕괴

by 예주JUNG

1894년 청일전쟁의 청(중국)의 패배는 성리학적 유교질서를 내포한 세계관의 완전한 붕괴를 상징했다. 한국의 교과서에선 동학농민운동 서술이 대부분이고 청일전쟁은 간략히만 서술되어 있으나 세계사적으로 보면 청일전쟁은 단순히 일본과 청나라간의 전쟁을 넘어 동서양문명의 충돌 더 나아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충돌이었다. 심지어 진보적 운동으로 평가받는 당시 동학농민운동에서조차 농민군들 스스로가 내세운 말들에서도 매우 유교적인 세계관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 또한 현실이었다.

오랫동안 유지된 아시아의 성리학적 질서는 아편전쟁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고 청일전쟁으로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의 결과는 조선내부에도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고 성리학적 질서를 종교처럼 믿던 지배층과 서당에서 사서삼경만 읽던 양반들도 충격을 받았다.


청일전쟁 불과 10여년전(1882) 청나라와 조선이 맺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전”과 청일전쟁 후 청과 일본이 맺은 “시모노세키조약”(1895) 첫째줄만 봐도 조선의 정치적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 수 있다.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전 첫 문장> <조선은 청의 속국이다.>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 조선은 완전무결한 독립자주국이고 기존에 중국에 행해왔던 조공행사는 폐지한다 >


조선반도에 대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두 강대국의 힘싸움을 조약문에서 느낄 수 있다.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언급된 “조선은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이다”라는 말은 조선은 청의 속국이 아닌 일본 영향력 안에 두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재조지은”(중국만 믿으면 우리는 안전하다.)만 생각하면서 사서삼경만 읽고 성리학 이외의 서양학문은 “사문난적”이라고 터부시한 수백년의 조선의 유교 체제는 외세에 의해 강제적으로 붕괴되고 있었다.

임진왜란(1592-1598)때 명나라 만력제의 도움으로 인한 조선의 생존은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중국 예속화를 더욱더 심화시켰고 성리학에 대한 맹신을 더욱더 강하게 만들었다.

에도시대천문학.png 에도시대 천문학책


1700년대 일본의 “스기타 겐파쿠”가 인체를 해부하면서 nerve를 관찰하고 이건 “ 신의 경락” 이라면서 神經 (nerve) 이라고 명명하면서 황제내경을 비판하고 중국중심 세계관을 비판할때도, 1800년대 일본이 서양의 물리 화학 수학 천문학을 공부할때도, 조선의 엘리트들은 사서삼경만 읽다가 세계사의 변화를 놓쳤다.


다음은 1896년 독립협회에서 독립문을 세우고 발행한 독립신문(영문판)의 한 구절이다.



개화파들도 성리학의 문제점을 깨닫고 변화하려고 노력을 하기 시작했으나 너무나도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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