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는 마음도 없어졌을 때

by 동이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는다. 어떤 기쁜 일이 생길 거라는 설렘도,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다는 욕심도 사라진 무색무취의 상태.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지만, 동시에 삶의 색채도 사라졌다. 세상은 찬란한 원색으로 빛나는데 나만은 흑백 필름 속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꿈을 꾸라고 말하지만, 나에게 꿈은 깨고 나면 허망해지는 환상일 뿐이다. 기대는 사치였고, 희망은 잔인한 형벌이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나는 이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 감정의 전원을 꺼버린 채 살아간다.

"무슨 낙으로 사니?" 친구가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그냥, 오는 날을 사는 거지." 사실은 마음속의 엔진이 꺼져버린 것 같다. 더 이상 뜨거워지고 싶지 않고,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기대를 포기했다. 기대는 곧 실망의 전조임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니, 상처는 피했지만 생기도 잃었다. 기대하지 않는 마음은 안전하지만 고독하다. 바다를 보아도 감흥이 없고 꽃이 피어도 계절의 변화를 느끼지 못한다. 내 삶은 마치 소리가 나오지 않는 TV 화면처럼 적막하다.

사람들은 무언가 결핍되었을 때 슬프다고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때가 더 두렵다. 슬픔은 오히려 살아있다는 증거지만, 무감각은 존재의 희박함이다. 나는 왜 이렇게 변해버린 것일까. 아마도 너무 많은 기대를 하고, 너무 많은 실망을 했기에 이제는 더 이상 내줄 마음의 조각이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흑백의 세상도 그 나름의 고요함이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는다. 격정적인 파도는 없지만 잔잔한 호수 같은 평온. 비록 그 평온이 정체된 물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이 고요가 내게 가장 필요하다. 나는 이제 억지로 색을 입히려 하지 않는다.

무채색의 풍경 속에 갇힌 나는 삶의 관객이 되어버렸다. 주인공으로서 무대 위에 올라가 박수를 받거나 야유를 듣는 대신, 객석 뒤편에 숨어 소리 없이 지켜보기만 한다. 하지만 삶은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하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나 자신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 것과 같다. 다시 무언가를 기대하는 일이 두렵지만, 그 두려움을 뚫고 작은 소망 하나를 품어보고 싶다. 내일 아침 마시는 커피가 조금 더 따뜻하기를, 길가에 핀 이름 모를 꽃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를. 거창한 희망이 아니라 소소한 기대를 회복하는 일부터 시작하고 싶다. 기대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연료이기에, 나는 꺼진 엔진에 조심스럽게 불을 붙여본다. 무채색의 풍경 위에 아주 작은 점 하나가 찍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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