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그런 날이 찾아옵니다. 우리의 일상에 불청객처럼 예고 없이 방문하는, 모든 것이 갑자기 무채색으로 변하는 그런 날 말입니다. 어제까지 나를 들뜨게 했던 작은 취미들이, 설렘 가득한 계획들이, 심지어는 가장 아끼던 물건들의 빛깔마저 희미하게 바래버리는 이상한 순간입니다. 마치 온 세상이 일제히 약속이라도 한 듯, 그 흥미를 거두어 간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손에 잡히는 모든 즐거움의 실체가 투명해져 버리는 이 기분은, 사실 아무런 이유 없이 찾아오곤 합니다. 제일 좋아하던 것들이 오늘은 왠지 시시하게 보일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왜일까, 내가 달라진 걸까?' 혹은 '세상이 변한 걸까?' 하는 무의미한 질문들만 머릿속을 맴돕니다. 마치 고장 난 레코드판처럼 같은 질문이 반복되지만, 명확한 대답은 결코 돌아오지 않습니다.
가장 아끼던 책의 표지는 먼지가 쌓인 듯 따분하게 느껴집니다. 애정을 담아 찍어두었던 사진첩은 낯선 사람의 기록처럼 심드렁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평소라면 단숨에 달려가고 싶던 공간이나 사람들과의 만남도, 오늘은 그저 피곤한 의무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문득 무엇도 즐겁지 않은 그런 날이, 우리 모두에게는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삶의 명도가 한풀 꺾이는 순간, 우리는 그저 이유 없는 권태와 마주해야 합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와 하루 전체를 잠식하는 듯합니다. 이 공허함은 채우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더 깊어지는 신기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억지로 웃어 보이거나,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고 손을 움직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은 그저 텅 빈 움직임일 뿐, 영혼 없는 몸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즐겁지 않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더 활발하게 움직이는 스스로를 발견하며, 마음 한구석이 더욱 아려옵니다.
그렇게 시시해진 하루를 억지로 끌고 오다 보면, 어둠이 창밖을 덮치는 밤이 찾아옵니다. 낮 동안 애써 외면했던 공허함은 밤이 되면 더욱 선명한 윤곽을 드러냅니다. 지친 몸이 겨우 의자에 기댈 때, 비로소 우리는 모든 노력을 멈출 용기를 얻게 됩니다. 더 이상 즐거운 척할 필요도,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땐, 하던 일 대신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거대한 유리가 막고 있는 창문 너머의 세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과는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습니다. 창밖은 검푸른 어둠이 지배하는 공간이지만, 그 어둠 속에는 우리가 낮 동안 보지 못했던 무수한 것들이 숨어 있습니다. 반짝이는 가로등 불빛, 소리 없이 움직이는 자동차의 궤적, 그리고 까만 도화지에 수놓은 듯 빛나는 별들까지, 모두 고요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고요한 어둠 속에 잠시 시선을 묶어두세요. 그 어둠이 주는 절대적인 침묵과 평온함은, 낮 동안 우리를 짓눌렀던 시시함의 무게를 조금씩 덜어줍니다. 어둠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가 숨 막힐 정도로 짊어져야 했던 '즐거워야 한다'는 강박과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줍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응시하는 그 순간, 우리의 깊은 내면에서 무언가가 아주 작게 속삭이기 시작합니다. 그 속삭임은 낮에는 너무나도 소란스러워서 듣지 못했던, 우리 영혼의 가장 솔직한 목소리입니다. 고요한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당신만의 이유가, 당신이 다시 움직여야 할 작고 소중한 동기가, 천천히 다시 떠오르기 시작할 거예요. 시시한 하루가 끝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울 빛의 근원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