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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 Yoon Apr 08. 2021

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주간 독서-록]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한 건 아마 중학교 2학년 무렵. 또래보다 일찍이 글밥 있는 책을 시작해서인지 나는 책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빤한 내용의 희망차기만 한 청소년 소설보다, 변곡 있는 소설이 좋아 초등학생 시절부터 이모의 책장에서 몰래 몰래 훔쳐 읽었다. 일본 소설을 좋아한 이모 덕에 <삐삐 롱스타킹>을 읽던 꼬마는 곧바로 <벽장 속의 치요>처럼 자극적인 맛을 보았다. 단어조차 잘 이해되지 않으면서 나는 '어른들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특히 에쿠니 가오리와 요시모토 바나나 같은 일본 여성 작가들의 소설을 많이 읽었다. 나는 책 속에서 청아함을 배웠다.

 여튼 17살 즈음, <낙하하는 저녁>을 읽었다. 당시의 나는 문학을 현실 속으로 끌어들여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지극히 관습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리카가 바보같았고, 하나코를 상식 밖의 이기적인 여자라 생각했다. 장장 15개월이나 걸리는 이별을 이해할 수 없었다. 햇수로 4년이 지난 스물한 살의 나는 리카와 하나코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에 다다랐다. 나에게 이별을 고한 남자친구가 사랑하는 여성과 하우스 메이트 house mate 가 된다는 것. 작고 여리지만 속 심지는 무척이나 주관이 뚜렷한 하나코와 함께 산다는 것. 홀연히 떠났다 불쑥 돌아와 "어서 와" 나를 반기는 하나코와 산다는 것. 나는 리카의 시야에서 하나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도중, 리카가 다케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절실히 느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맘이 아파 잠깐 책을 덮기도 했다.

 남자들은 모두 한 번쯤 하나코를 사랑해본다. 한 번 사랑해보는 것이다. 첫사랑처럼. 하나코는 학창시절 새하얀 추억으로 남은 첫사랑과 닮았다. 초반, 리카는 이에 약간의 질투를 느끼는 듯 보이지만, 시간이 여물수록 리카 또한 하나코를 사랑하게 된다. 붉은 터틀넥 스웨터에 짧은 바지를 입은 하나코. 온실처럼 뜨끈한 방에서 생활하는 하나코. 소파 아래 한 팔은 축 늘어뜨린 채 누워 라디오를 듣는 하나코. 세븐 업은 꼭 반 정도 남기는 하나코. 소우치를 가장 사랑하는 하나코.

 책은 나의 성장을 가장 잘 눈치챈다. 내가 커가면서 새로이 내 맘 한 켠에 쌓인 것들을 가장 먼저 캐치한다. 이런 내용도 있어. 이젠 네가 이해할 수 있을 걸? 이것 좀 봐 봐. 그래, 이런 거라니까? 하고 말이다. 당장 5년 후의 내가 <낙하하는 저녁>을 다시 읽어도 지금과는 다른 센세이션을 느끼겠지. 그땐 지금의 생각이 어려보이겠지. 지금 내가 최선을 다했던 열일곱의 나를 아기 취급하는 것마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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