굼벵이
각자 주어진 환경, 살아온 궤적에 따라 본인만의 흉터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쯤은 이제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왜 나만 이렇게 힘들지?"라는 말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니 뒷편까지 그 말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있다.
불현듯 기분이 너무 좋은 순간에는,
주름을 박박 피고 애써 잘 가리어, 이젠 내 삶도 제법 빳빳하게 새옷같다 생각이 든다.
드물게도 그런 때는 아주 오래전부터 가지고있던 내 삶의 큰 주름,
그 자체를 아예 없앨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샘솟는다.
그냥 내가 가진 모든 문제들이 해결된 것처럼, 해결될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 어느 누군가는 자신의 무언가를 극복하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하니까.
하지만 문득 전날 열심히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풀먹인 옷에서 아주 오래된 주름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
그걸 그냥 덤덤하게 넘길 수가 없이, 너무나 속상하고 괴롭다.
아직 미성숙한 나한테는 그 주름 하나가, 흉터같다.
모두가 내 옷의 주름만을 볼거 같다. 그것을 흉하게 생각할 것만 같다.
요즘은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는데,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게 분명한데
고군분투하는 가족의 모습을 바라볼 때, 내가 굼벵이 같다고 느껴져 슬프다.
그냥 주름을 많이 지니고 태어난 존재.
그 모습 자체가 너무 마음이 쓰라리고 아픈데, 나도 그저 그런 굼벵이일 뿐이라.
그냥 그 주름을 이용해 바닥을 기어다니는 존재라서, 내 주름을 부끄러워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게 없다.
그게 너무 절망스럽다가 화도 났다가 미웠다가 부끄럽다.
우리 모두가 굼벵이라면, 각자 다른 주름을 가지고 태어나서
누군가는 굼벵이에서 그 무언가로 변하기도 할텐데.
나는 그냥 내 주름 하나하나가 밉기만한 굼벵이라, 구르는 재주조차 없어서.
구를 생각 조차도 못하는 나여서, 그냥 자기 혼자 바닥을 기어다니며 풀 뜯어먹기 바쁜 존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