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자의 지독한 궁상
심리상담을 받았던 때,
나에대해 새롭게 알게된 사실은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하지도 않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었다. 뭘 하자해도 다 좋다, 아무거나 먹어도 좋다, 상대방이 원하는걸 하자.. 음식 메뉴 고르고 갈 곳을 고를 때부터.. 무언가를 좋아할 때도 열렬히 좋아해 본적이 없다. 항상 어중간한 온도로 미적지근하게,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성인이되고 여러사람들을 만나면서 이런 성향이 더 강화되었는데, 일종의 방어기제나 회피라 생각한다.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했다가, 그렇지 않게됐을 때의 허무함이나 상실감도 싫고... 무언가를 좋다했다가 상대방에게 거부 당해서 마음 상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도 이런 회피는 지속되었는데, 마음에 드는 누군가에게 자꾸 눈길이 갈 때마다.. 항상 했던 말이 있다. 하루를 만나도 평생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좋아하는 사람을 오죽하겠냐는거 였다. 그 말을 뱉을 때마다 일렁이던 마음을 잠재우고 지레 마음을 접거나, 좋아했을 때 염려되는 상황들만 되새기며 아무것도 하지않았다. 그냥 그렇게 흘려보냈다.
그렇게 이도저도 아니게 살아오다가, 계속 그렇게 살다가 최근에 이르러서야 이런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내가 비겁했다고, 매번 회피만 반복한다고.
두세달 전쯤 맥주 한잔을 하는데, 친구가 말하기를 안될거같고 내가 상처받은게 뻔한 연애도, 다 경험이라는 말을 꺼냈다. 사랑의 좋은 면이 아니라, 힘든 면까지 모두 경험하는게 인생의 자산이기에, 자신의 감정을 후회없을 정도로 부어내기로 했다는 말을 하는데 내 심장이 철렁거렸다.
나는 이미 그때쯤 한없이 뒷걸음질 치며 좋아하는 사람을 놓으려고 하고있었고, 실패를 하거나 상처 받지않아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처도, 실패도 경험이 맞고 그게 내 삶의 자산이라는 말이, 사랑에도 적용된다는게 나한테는 상당히 센세이션했다. 언뜻 당연해보이지만 우린 모두 성공신화만 보며 살아가는 SNS중독자 아닌가... 고도의 SNS중독자인 나도 어쩌면 사랑과 연애에있어선 성공중독 강박자였던거였다..!
이미 내 회피로 점철된 관계에서 기적을 찾을 순 없었고, 내가 한순간에 태도를 바꿔 미친 이세계 사랑꾼이 되지도 못했다... 그냥 내 마음에 그 말이 깊이 남아있었을 뿐이다.
지금와서 이렇게 하여자스럽고 쪽팔리고 중2병스럽고 일기장에나 쓰지 왜 여기서 난리지?하는 글을 쓰는 이유는... 다시 이런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않아서이다.
"그 친구"와의 관계가 어긋난 뒤에(내가 망쳐버린 뒤에) 나는 한동안 환상속에 살았다. 지금와서는 정말 미치도록 창피한데, 상대방도 사실 나와 같은 마음이었지 않았을까? 나에대한 일말의 감정도 남아있지않을까? 상황이 바뀐다면, 시간이 지난다면 또 달라지지않을까? 하는 미친생각...
진짜 글로 쓰는 이 순간에도 너무너무 스스로 수치스럽고 창피하다... 이런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 머리가 돌아서 흑역사나 뿌리고 최악의 구애인으로 기억될 언행이나 발사하니... 나를 포함 다들 이런 망상에서 벗어나시길... 이런 사람들이(나포함) 새벽에 자니..? 좋아보이더라... 같은 디지털 쓰레기 방출하는거다... 다행히도 나는 아무것도 못하는 겁쟁이라 또다른 디지털찌꺼기를 양산하지는 못했다... (행동력없는 찌질이인게 이렇게 감사했던 적은 없다.)
최선을 다해 아무렇지 않게 아무 일도 없던거 처럼, 인생을 잘사는 척하며 한동안은, 음습하게 "만약에...이랬더라면..."을 반복하고... 그 친구와의 순간을 끊임없이 회상했고 내심 상대방도 그러지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다 며칠전부터 꿈에서 깨어나듯이 깨달았다. 상대방에겐 내가 악몽일 수도 있고, 이미 기억도 나지않은 스쳐지나간 사람일 수도 있고, 상처일 수도 있으며... 상대방에게 나와 같은 감정과 추억을 기대하는건 내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친구는 앞으로 나아가며 나와 무관한 자신만의 삶을 걸어가고 있을텐데, 나 혼자 그 자리에 남아 망상을 하고있단걸. 왜 난 항상 당연한걸 뒤늦게 깨닫는가...?
이미 사라진 게임 맵 속에 덩그러니 남아 혼잣말을 반복하는 NPC 상태에서 벗어나야한다는 현실자각에 조금은 서글퍼지긴 했었다. 물론, 내 손으로 망쳐버린 관계니 슬퍼할 자격도 없지만서도... 어떤 꿈 속에서 깰 때의 서글픔이란게 있지않은가. 나의 좋아함과 추억이 상대방에겐 최악으로 기억될 수 있단건, 상대와 내 감정이 다르다는걸 자각하는건 꽤나 가슴 아픈 일이다.
이런 생각의 흐름을 겪고나니, 그 친구의 말처럼...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혼자 쪽팔리고 힘들어도 나를 성숙하게 만드는구나... 사실 가장 후회됐던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었는데, 다음엔 내 감정에 더 솔직해야겠다는 배움도 얻었고 말이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게 내 삶의 경험이라면, 이젠 망설이지 말아야지. 이 사실조차 깨닫게 만들어줘서 두 사람에게 참 고맙다.
(진짜)친구가 그 이후 했던 말이있다. 누구나 가장 좋아하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람을 한명씩 품고 살아간다고. 그 말이 묘하게 위안이되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게 설령 지독한 짝사랑으로 끝날지라도.. 나의 짝사랑도, 누구나 품고있는 "좋아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람"을 남기는 경험이었을테니까.
새삼 한마디도 표현해본 적 없고, 나 스스로도 내 감정을 들여다보지 못했어서 이렇게까지 좋아했었구나 싶어 놀랍기도 하지만, 지금은 놀랄 때가 아니겠지... 이젠 나의 찌질함을 받아들이고, 그 경험으로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지 고민할 때이다. 또 오늘이 지나면 다시 후회만 하고, 그리워할 수 있겠으나 어떡하겠나, 시간은 되돌아 오지않는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나아가야지. 소중한 추억을 자양분삼아 더 좋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지.
고맙고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