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알
그는 몸을 일으켰다. 쌓인 눈 때문인지 감각이 무뎌졌다. 한기 서린 바람이 불어온다. 살얼음 같은 추위가 파고들었다. 다리를 질질 끌며 나아가기 시작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나아간다. 나아가야만 하고, 나아가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등 뒤에서 총성이 잇따라 울린다. 그게 마치 출발 신호라도 되는 양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한다. 다시 한번 총성이 울려 퍼진다. 그는 달렸다. 한기 서린 추위는 그를 감싸 쥐는 것만 같았다. 눈앞이 흐렸다. 보이는 거라곤 온통 새하얗게 뒤덮인 세상뿐이었다.
마침내 계단 끝에 다다랐다. 그는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며 잠시 망설였다. 뒤를 돌아보았다. 지나온 계단은 현기증과 메스꺼움이 느껴질 만큼 높아 보였다. 문이 열리자, 그 틈 사이서 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어두컴컴한 계단을 밝혔다. 회색빛의 콘크리트와 깨진 전등, 습기에 젖은 바닥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알아들을 수 없게 속삭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들어본 적 없는 언어였다. 거무스름한 피부의 군인들이 그를 부축했다. 그는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묵음 같은 말소리를 들었다. 야전 병원의 아침은 고요하기만 했다. 쉼 없이 들려오던 포성도, 총성도, 귓가에 맴돌던 고함과 비명마저도 사라져 버렸다. 이따금 겨울 철새들이 오가곤 하며 지저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병원 침대 위에 죽은 듯 가만 누워 있었다. 군의관은 왼발을 절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잠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문이 닫히자, 계단은 다시 어둠 속에 잠겼다. 사람 하나 없는 반지하방은 스산하기만 했다. 아련하게 새어 들어오던 빛줄기마저 문이 닫히자 축축한 콘크리트 속에 흐트러졌다. 천장 높이에 매달린 창문은 신문지와 커튼으로 막혀 있어 모든 게 까마득했다. 먼지와 신문지로 어질러진 방은 마치 시간이 멈춰 버린 것만 같아 보였다. 물 자국으로 더러워진 거울은 언제까지고 똑같은 풍경을 비출 터이다. 거울 속엔 물때 낀 화장실 벽과 꼭 닫힌 문뿐이었다. 잔잔히 흐르는 개울가도, 눈 내린 겨울의 풍경도, 총을 둘러멘 앳된 아이도 없었다. 반지하방은 그렇게 언제까지고 적막과 침묵 속에 잠겨 있을 것이다. 짙은 밤과 안개 아래, 언제까지고 잠겨 있을 터다.
이른 아침, 사람 하나 없는 거리의 적막함을 뚫고 목발 짚는 소리가 들려온다. 길거리는 노을 속에 잠겨 있었다. 서글픈 울음소리를 들었다. 아이는 쓰레기 사이에 웅크려 앉아 있다. 나는 병원 침대에 누워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발이 있어야 할 텅 빈 곳에서 어렴풋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무릎을 꿇어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그마한 손이 낯설었다. 바람과 빗줄기를 가르는 천둥소리에 몸을 웅크렸다. 끊임없이 세차게 뛰어대는 심장에 손이 떨렸다. 또 한 번 울리는 천둥소리에 움츠러들며 침대에서 떨어졌다. 그는 아이를 등에 업고 일어섰다. 다시 침대 위로 손을 뻗자, 나는 침대 한가운데 곤히 잠들어 있는 아이를 발견했다. 아이는 평안히, 소리 없이 꿈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햇볕은 따스하게 흰 이불 위에 부서지며 그림자를 밝혔다.
한없이 웃어보았다. 아이가 웃어 보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