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나간 총알-7

애향

by 송유준

하염없이 개울가를 거닐고 있다. 어디가 북이고 남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노면전차 운전원이 문제를 제기한다.

“이쪽이 아니야. 이 개울은 우리가 가야 할 곳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고등과 학생이 정론을 말한다.

“어디가 옳은 방향인지는 나침반이 필요해.”

대학생이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루터기의 나이테를 보면 방향을 알 수 있댔어.”

나무꾼이 사실을 말한다.

“나이테는 어느 한쪽도 가리키지 않아.”

소대장이 중재한다.

“우선 여길 벗어나야 해.”

네가 말한다.

“나 죽거든, 저 개울물에 흘려보내 줘. 그대로 내 집까지 흘러가게끔 보내 줘.”

소대원 모두 널 쳐다본다. 그들은 너처럼 절망한 자들이 얼마 가지 않아 소리 없이 쓰러지는 걸 봐온 참이었다. 하지만 결국 너만이 살아남았다. 총알은 모두 그들에게로 흘렀다.

추운 겨울 탓에 발걸음은 더뎠다. 나아갈 이유가 보이질 않았다. 두껍게 쌓인 새하얀 눈덩이 위로는 아무런 흔적도, 발자국도 없었다. 사람의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더 이상 싸워야 할 이유도, 더 이상 나아가야 할 이유도,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이유도 알지 못했다. 그저 발이 닿는 대로 개울가를 따라서 가고 있었다. 아까의 저격수에게서 몇몇을 잃었다. 얼굴을 맞은 사람, 낙오된 사람들은 그곳에 남겨졌다. 아마 눈 덮인 평지에서 언제까지고 가만 누워 있어야만 할 터다. 쌓인 눈이 녹는 계절이 오면, 그들 위로도 덮인 눈덩이도 녹아 땅에 스며들곤 풀잎 사이로 사라져 갈 것이다.

한순간, 총알이 빗겨나갔다. 소대장의 계급장이 붉게 물들었다. 넌 산등성이 너머 숲으로 달려든다. 주변엔 그 누구도 없었다. 걷고 걷는다. 목적지는 불분명하다. 그저 나아가기만 한다. 방향감각을 상실했다. 어느 순간 걷고 있던 장소를 빙빙 돈다.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하며 지나온 자리에 물결무늬를 만들어 내곤 한다. 정신이 흐릿해지곤 또다시 기억에 젖어 든다. 그 오랜 기억과 추억 모두 지금 와선 흩어지곤 잊어버렸다. 분명 그리운 기억이었을 터이고, 분명 향기로운 추억이었다. 그러나 잊혀야만 했고, 잊어야만 한다.

나아가는 발걸음마다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발이 땅에 맞닿고 떨어질 때마다 기억은 흐릿해지곤 또다시 뚜렷해진다. 기억이 또렷해질 때마다 주변 사물은 까마득하게 아른거린다. 눈송이가 내려와 새하얘진 세상이 어느 순간 푸른빛으로 물들곤 어디선가 따스한 바람이 불어오며 맞닿는다. 저 너머에 보이는 봄의 색채가 손짓하고 있다.

둔덕을 넘어서자 자그만 마을이 보인다. 집마다 화롯불이 켜져 있다. 굴뚝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따스한 음식 냄새가 난다. 새하얀 세상 한가운데로 다채로운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사람의 온기였다. 겨울의 따스함이었다. 눈앞에서 일렁이던 봄의 색채는 다시금 무뎌지고 흐릿해져 간다. 저 너머로 보이는 자그만 마을만이 뚜렷하게 보인다. 마을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전과 달리 분명한 목표가 있는 발걸음이다. 나아가는 발걸음엔 더 이상 회의감도, 죄책감도, 두려움도 없었다. 맹목적인 희망이 아니다. 분명한 실제이다.

어느 초가집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집 안은 따스한 열기로 가득했다. 언 마음을 녹이는 온기이다. 그러나 사람 한 명 보이지 않는다. 그저 환영이었던 것일까? 한낱 꿈에 불과했던 것일까? 하지만 너무도 생생하다. 장롱을 열자, 옷가지가 보였다. 낡은 옷들이다. 겨울을 나기 위해 천을 덧댄 옷이다. 넌 누비옷을 집어 들었다. 옷가지를 품에 한가득 안아봤다.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온 순간, 머릿속에 폭죽이 터지는 듯 충격이 전해지더니 의식이 흐려졌다.

입에서 쇠 동전 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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