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쓰인 총알
그만 거울에 숙이고 있던 머리를 죽 빼내었다. 방 안은 고요했다. 어느새 추운 겨울에서 다시 현실로 되돌아와 있었다. 거울 너머엔 수척한 늙은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아까 전 보았던 총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엔 그저 주름만이 자글자글했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한순간 모호해졌다가, 다시 원 상태로 돌아온다. 더 이상 총상도, 추위도, 자그만 성냥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어깨에 둘러메어져 있던 소총도 이젠 없었다. 전선에서 돌아왔다. 전선 후방에 낙오되었던 순간들은 과거가 된 채 기억 저편으로 남겨졌다. 이젠 폐허가 된 고향집으로 돌아가 보았다. 추억이 들어있던 물건은 모두 포격에 갈기갈기 찢겨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 읽던 책, 침상, 부엌의 솥, 화롯불, 아버지, 어머니…
홀로 살아 돌아왔다. 빗발치던 총알 가운데를 지나면서도 자신에게 날아오려던 총알만은 피했다.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허탈했다. 빗나간 총알들… 원래라면 나에게 날아와야 했을 비껴간 총알들… 그것들 모두가 엇나간 총알이다. 원래라면 그것들 모두 나에게로 와야 했다. 빗겨 나가고 어긋난 총알들, 저 숲속 너머로, 관목 사이로, 눈덩이 아래로, 허공으로, 타인의 머릿속으로, 가슴속으로 어긋나가는 게 아닌, 나에게로 틀어 모두 산산조각 내고 갈래갈래 조각내야 했을 빗나간 총알들… 그들이 아닌 내가 유일하게 죽은 사람이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엔 나밖엔 없다. 살아서도 죽은 듯한 채, 텅 빈 껍데기만을 남기곤, 추레하며 추악하고 공허한 몰골의 나는…
거울 속으로 펼쳐진 세상엔 희멀건 물 자국과 먼지로 가득했다. 그 형상이 꼭 눈이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거울 너머로 자리 잡은 형체가 급격하게 뒤틀리며 일렁이고 있었다. 환각을 보듯 주위 모든 사물이 두 갈래로 분열해 보였다. 시선 끝에 걸친 그 모든 것들이 흐릿하게 번지며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 환상과 분열은 마침내 잔잔한 물결의 일렁임으로 변모해, 조용히 소용돌이쳤다. 그 물결침과 소용돌이는 분명 과거의 잔상이었다. 언제까지나 나를 쫓아올 과거의 잔흔이다.
개울가를 따라 정처 없이 걷고 있었다. 더 이상 어디가 북이고 남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씩, 빠르게 친구들이 쓰러져갔다. 눈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가, 어느새 뒤를 돌아보면 소리 없이 눈을 감은 채 고요히 잠들어 있는 듯이 죽어 있곤 했다.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온다. 이번엔 소대장의 계급장을 정통으로 맞췄다. 몇몇 소대원이 그를 부축하려 들었지만 이미 축 늘어진 채 검붉은 피를 새하얀 눈 위로 흘리며 질질 끌릴 뿐이었다. 몇 번 더 총성이 나지막이 들려오자 그를 부축하던 소대원들마저도 축 늘어져 눈바닥에 엎어졌다. 차가웠던 눈송이는 뜨거운 피와 맞닿자 녹으며 푹 파였다.
우리들은 총이 날아온 편으로 몇 번 사격했지만 그게 어디로 날아가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능선 너머 새하얀 눈밭 사이 새까맣고 자그만 점선들이 이어져 있었다. 그 위론 기총 사격으로 인해 피어난 연기가 자욱했다.
근처 나무 뒤로 몸을 날려 엄폐했다. 다른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절망적으로 대응 사격을 해댔지만, 총알은 허공을 가로지를 뿐이었다. 마침내 대응 사격 소리마저도 멎자, 능선 너머에서 열댓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산비탈을 내려오고 있는 게 보였다. 손에 들린 개런드 소총 총신을 신경질적으로 매만졌다. 저들이 한 발짝 가까워질 때마다 머릿속으로 폭죽이 터지는 듯 두통을 더해갔다. 한겨울인데도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이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어깨를 짓누르는 군장, 근육통이 느껴지는 손목, 가만있는데도 자꾸만 바람에 휘날려 나부껴대는 혁대, 자꾸만 두통을 더해가는 철모…
총신을 손에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