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입에서 쇠 동전 맛이 난다. 아무래도 이빨 한 개가 빠진 것 같았다. 이제 시간이 머지않았다. 방금 그들이 군장에 든 모든 물건을 가져가 버렸다. 어깨를 짓무르는 고통을 견디고 여태 지녀온 것인데, 외투 안 주머니에 들어있던 마지막 남은 성냥갑마저 가져가 버렸다. 아마 탁상 위에 적당히 늘어놓곤 아무렇게나 분배할 터이다. 지나온 시간과 지나갈 시간 모두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총신을 손에 꽉 쥐었다.
능선 위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작은 점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군 한 명 없었다. 총에 맞아 쓰러진 이들만이 눈에 아른거렸다. 사방에서 비명과 고통에 겨운 신음, 허공을 가르는 총알 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만 옳게 선택한 것일까? 넌 뒤돌아 떠나갔다. 황량한 숲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도망쳤다.
숲은 황량하기만 하다. 한때 이 숲 사이론 푸른 초목과 잎사귀가 울창히 피어올랐을 터다. 지금은 겨울의 매서운 한기에 내몰려 새햐얗게 텅 비어 있다. 한 때, 이 숲 사이를 비집고 올라가 나무를 베던 이들이 있었을 터다. 지금은 바싹 메말라 초라해 보이는 그루터기 위에 올라앉아 잠시만이라도 열기를 식히던 이들이 있었을 터다. 그러나 그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숲은 시간 속에 잊혀 버렸다. 시간은 일말의 잔흔도, 기억도 남기지 않은 채 모든 것을 휩쓸고 갔다. 포탄 구덩이와 화약 냄새는 그런 희미한 시간의 흐름마저 장막 아래 감싸곤 잊게 만들어 버린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나아갈 때마다 미처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 몰려온다. 기억들은 인식을 방해한다. 머릿속으로 따스한 봄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마치 정말로 봄 한가운데에 있는 것만 같았다. 누군가의 웃음소리, 이야기 소리, 사람의 온기… 눈앞에 보이는 새하얀 눈송이가 흐려지곤 푸르른 색채로 가득 찬다. 기억에 몰두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한순간 봄의 색채가 흐릿해지더니 진흙과 먼지기둥이 솟구쳐 오르는 게 보인다. 비명과 아우성이 들려온다. 기관총 사수는 죽어서도 방아쇠에서 손을 놓지 못한 채 축 늘어져 있다. 포성이 한 차례 지나가자, 호각 소리와 함께 능선 너머에서 작은 점선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방아쇠를 당기는 것이 두려웠다. 누군가가 당긴 방아쇠의 총구 끝에 마치 내가 매달려 있는 것 같아 두려웠다. 밤이 찾아올 때면 온 정신이 피로에 젖어 천천히 죽어가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눈을 감아본다 한들, 귓가엔 총성과 폭음이 스쳐 지나갔다. 텅 빈 손엔 방아쇠의 축축한 감각이 고스란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잠이 든 것인지, 두려움에 떨며 깨어 있는 것인지 모를 혼미함 속에 밤을 지새워야만 했다.
괴로움에 발버둥 치며 미친 듯이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통곡하듯 울음을 터뜨리다간 정신을 놓은 듯 유쾌하게 웃음소리를 내봐도 감정마저 바짝 메마른 것인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포격 소리가 들려오기만 해도 쏟아지던 눈물은 메마르곤 이젠 그저 공허한 감정만을 허공 너머로 쏟아낼 뿐이었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기존의 존재는 이미 죽어 사라져 버리곤, 빈자리를 꿰찬 타인이 된 것만 같다. 그 타인의 의지로 먹고 쏘고 죽이며 발버둥 치는 기계이다. 타인의 의지 없이는 움직이지도 형용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귓가로 벌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란히 참호에 서 있던 누군가의 철모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구멍 뚫리곤 검붉은 피가 흘러내린다. 산 자들은 고개를 숙여 엄폐했지만, 총에 맞은 이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들은 참호 위에 언제까지고는 머리를 처박은 채, 뜬 눈으로 흙 속을 들여다볼 터다. 마치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보내며 보초 일을 끝마치려는 모양새 그대로, 진창이 된 흙 너머를 뚫어져라 지켜볼 터다.
총을 참호 밖으로 내밀곤 조준하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총알을 흩뿌렸다. 그런 식으로 흩뿌려지는 눈먼 총알이 많았다. 그중 몇 발은 어긋나고 빗나가기도, 보초를 선 누군가의 머리, 얼굴, 철모를 향해 나아간다. 총을 흩뿌린 이는 자신이 무엇을 맞추었는지도 모른 채 또다시 눈먼 총알을 흩뿌려댄다.
순간, 어떤 거대한 충격이 몸을 훑고 한 차례 진동하더니, 고막이 찢어질 듯 굉음이 울려댔다.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뒤섞이며 터질 것만 같았다. 이어 몸이 공중에 붕 뜨면서 균형 감각이 흐릿해졌다. 불꽃이 일더니 섬광 같은 것이 번쩍였다. 뜨거운 열풍이 몸을 스쳐 지나가며 바람이 이끄는 곳으로 몸을 끌어당겼다. 자그만 먼지와 흙 알갱이가 총알처럼 사방으로 튀겨대어 쓰라렸다.
섬광이 사라지자, 이번엔 머리를 진흙에 처박은 채 고통에 겨운 신음을 내고 있었다. 숨을 쉬어보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가슴 언저리에서 축축한 통증이 느껴졌다. 온 중력이 짓누르고 있다. 무게추를 매단 듯 숨이 막혔다.
사방에서 고함이 일더니 다음 순간 기관총의 사격 소리와 비명이 들려왔다. 일어나 보려 했으나 무게 추는 빠져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진흙에 처박힌 머리를 들어 올려 주위를 살폈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무어라 도움을 청하려 입을 열었으나, 온몸을 짓누르는 무게추가 목구멍까지 막아버린 것인지 날카로운 바람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누군가의 억센 손이 팔을 부축하려 들었다. 넌 무어라 말하기 위해 색색이며 다리를 버둥댔다. 몸이 질질 끌리며 진흙이 덧칠됐다. 그러나 그 억센 손은 축 늘어진 몸을 잡아끌어 참호 가장자리에 치워두었다. 다시금 머리를 처박은 채,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고함과 아우성만이 남았다. 숨을 쉬어보려 할 때마다 자꾸만 입안에서 흙 맛이 느껴졌다. 허파가 움직일 때마다 무게 추는 한둘씩 더해져 갔다. 다시 머리를 들어 올려보려 해 봤으나,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진흙 속에 천천히 익사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