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가
몸을 움직여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변으로 쌓여 있던 눈송이가 흩날려 바람결에 춤춘다. 최대한 둔덕 가까이 붙어 주변을 살폈다. 나무 사이 너머 꽤 높아 보이는 언덕이 있었다. 저곳까지 개활지대를 넘어 도달하는 데만 성공한다면 저격수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이다. 내달릴 준비를 했다. 얼어붙은 손발이 떨렸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심장이 뛰었다. 마음속으로 수를 세 봤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하나, 둘, 셋, 넷… 심장 아래서 출발 신호가 들려왔다. 두꺼운 군화가 발아래 눈덩이를 있는 힘껏 지르밟았다. 순식간에 개활지대로 들어섰다. 주위를 둘러싼 풍경은 숨 막힐 정도로 빠르고도 절망적 이도록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물을 똑바로 분간할 수 없었다. 눈앞으로 보이는 저 언덕 외엔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바람결을 스치는 총성이 울린다. 빗나갔다. 또다시 총성이 들려온다. 총알이 박히는 소리가 들린다. 몸이 쓰러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들린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소리가 저 너머에서 들려온다. 눈을 꽉 감았다. 통증이 밀려온다. 그런데도 지체 없이 저 너머로, 저 앞으로 달려가려 했다. 또다시 총성이 울린다. 눈앞이 어두워졌다. 머릿속이 아득했다. 얼굴이 조각조각 깨져 흩날리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다음 총성이 울리던 순간, 눈앞엔 새하얀 언덕이 보였다. 이미 중턱 너머에 도달해 있었다. 총성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비명도, 몸이 쓰러지던 소리도 언제 있었냐는 듯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이젠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급히 지친 몸을 끌어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언덕 너머는 앙상하게 빼 마른나무와 새하얀 눈밖엔 보이지 않았다. 전에 얼굴을 들이밀었던 차가운 개울이 이곳에서 이어지고 있었다. 개울 속엔 버려져 녹이 슨 철모와 군화들이 가라앉아 있었다. 살갗이 얼어붙어 버린 채 나무토막처럼 물 위로 둥둥 떠 오른 사람들이 보였다. 군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눈처럼 새하얀 흰옷 위로 벌겋게 푹 팬 총알 자국이 보였다.
그간 시체가 녹아든 물이 담긴 수통을 몸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목이 말랐다. 수통 마개를 매만지며 당장 목을 축여볼까 했지만, 이내 바닥에 쏟았다. 수통 안에 들어 있던 혼이 눈덩이를 적시는 듯했다.
휘청이며 개울가로 걸어갔다. 시신이 물가에 쏠리는 방향을 거슬러 상류로 다가갔다. 조용히 소용돌이치는 물결 속에는 물고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쪼그려 앉은 채 장갑을 낀 두 손을 모아 차가운 물을 한 모금 삼켰다. 머릿속이 아팠다. 또 한 모금 들이켤 때마다 갈증은 해소됐지만, 고통이 더해졌다. 목은 칼날을 삼킨 듯 너덜너덜 갈라졌고, 차가운 물이 몸속으로 퍼질 때마다 쓰라렸다.
그때, 물속에 자리 잡은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피로하여 보이는 눈매, 수척한 얼굴, 허옇게 질린 몰골이었다. 물결에 반사된 제 모습은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그런 한가운데로 푹 팬 총상이 보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죽음의 무게를 간신히 버티는 듯이, 상처는 무겁게 짓눌려 달랑거리고 있었다. 문득, 이미 죽어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소총 총알에 얼굴이 관통되어 살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분명 죽은 사람일 것이다. 아니라면 이미 사후세계에 온 것이거나… 그러나 아직 살아 있었다. 분명 숨을 쉬고 있었다. 물결에 반사되어 비치는 그 몰골은 분명 산 사람의 얼굴이었다. 이상했다. 고통도, 일말의 쓰라림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데서 극도의 어지러움과 뱃속이 울렁거리는 느낌만이 스칠 뿐이었다. 마치 타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물결에 반사되어 비친 모습이 아닌, 저 물가 너머 자리 잡은 타인이 제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동안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넋을 놓아버릴 듯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