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나간 총알-3

적린과 마찰제

by 송유준

눈을 흩뿌리는 구름에 태양은 가려진 채 옅은 빛줄기만은 드리웠고, 금방이라도 해가 저물어 버릴 듯이 주변은 점차 어두워져 갔다. 오로지 숨 막힐 듯한 정적과 단조로운 바람 소리만이 감돌았다. 단지 온몸이 얼어붙을 듯 추워졌다는 것만이 똑바로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손마디엔 살갗을 파고드는 한기가 스며들었다. 머릿속에까지 새하얀 서리가 낀 듯 정신이 아득했다. 초마다 흐르는 영겁의 시간이 쌓아온 피로감인지, 이 추위가 마침내 죽음으로 이끌려는 손짓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마저 인식할 수 없이 흐릿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외투 안 주머니에 손을 옮겼다. 그곳 역시 한기가 스며들어 있기는 매한가지였다. 언 손에 간신히 잡힌 건 자그마한 성냥갑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여럿을 의미 없이 낭비한 결과였다. 그중 한 개는 반으로 부서진 채, 또 하나는 성냥 머리 부분이 물에 젖어 얼어붙은 채, 그나마 나머지 하나만은 보기에 멀쩡했다. 후일을 위해 남겨둔 것이었다. 그 유일하게 정상적인 성냥 위에 손을 멈췄지만, 잠시 얼굴을 부르르 떨더니 결국 집어 든 건반으로 잘린 성냥개비였다. 반으로 잘린 만큼 열기 또한 한순간 번쩍이곤 금방 사라져 버릴 테지만 지금 와선 그게 유일한 방안이었다. 성냥불을 붙이려 들었다. 그러나 손이 뜻대로 따르지 않았다. 마치 또 다른 인격이라도 지닌 듯이 성냥을 든 손은 심하게 떨려댔고, 자꾸만 헛손질만을 날려댔다. 사포에 닿았다가도 곧 빗겨나가곤 또다시 마찰면에 가까이 가져다 대어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길 반복했다. 순간 성냥을 놓친다. 저 눈더미 너머 어디론가로 파묻혀버린다. 그것을 다시 집어 들기 위해 다시 떨리는 손을 가져다 댄다. 겹겹이 쌓인 눈송이와 손가락이 맞닿을 때마다 더 깊게 얼어간다. 간신히 성냥을 다시 집었으나, 다시 놓쳐버리곤 다시 잡으려 들었다. 마침내 성냥을 손에 쥐었을 땐, 이미 머릿속이 완전히 새하얗게 세 버린 채 마음속 한편에 죽음을 위한 자리를 준비해 두고 있던 참이었다.

비몽사몽 중에 다시 사포에 성냥을 가져다 대고 긋는다. 이번엔 제대로 그었음에도 정작 불이 붙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더 사포에 성냥을 긋는다. 힘이 부족한 건지 눈에 젖은 것 때문인지 몰랐다. 다만 또다시 성냥을 그었다. 그렇게 사포와 맞닿는 성냥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러곤 어느 순간 번쩍하고 불꽃이 일더니, 마침내 불이 붙었다. 그러자 백지장이 되었던 머릿속이 급격히 정리되어 가더니, 그 자그만 불꽃의 일렁임 속에서 그 어떤 강렬한 열망이 타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급히 몸 가까이 가져다 대려는 순간,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다. 눈 사이 파묻힌 새 둥지였다. 생각이 스쳐지니 갈 새도 없이, 자신도 모르게 이미 둥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미약하게 꺼져가던 성냥불이 메마른 나뭇가지에 닿자 얼어붙은 손끝을 녹이는 열기가 튀어 올랐다. 불에 타오르는 비둘기 둥지를 손에 쥔 채 조금만 더, 그 열기를 손안에 가둬두었다. 그 강렬하면서 매서운, 동시에 따스한 불길은 주위 모든 것을 그 속으로 집어삼킬 듯이 붉게 타오르며 검은 재를 날렸다.

날이 져갔다. 태양은 지평선 너머에 걸쳐 있었다. 사위가 어두워지자, 공기는 더욱 깊숙이 얼어가며 날카로운 바람을 날려댔다. 이젠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철모를 둔덕 위에 올려 저격수가 떠났는지 확인해 볼지 생각했지만, 차라리 몰래 움직이는 것이 나았다. 둔덕은 그리 높지도, 그리 길게 늘어져 있지도 않았다. 사람 대여섯 정도만 간신히 들어설 수 있을 정도였다. 다만 주위로 무수히 많은 나무가 자라 있어, 여름이라면 풀숲과 나뭇잎에 의해 그리 눈에 띄지도 않는 곳이었을 테다. 이전에는 그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작은 둔덕 사이엔 삶과 죽음의 기로가 있다. 여태껏 걸어온 삶의 의미가 한순간 소리 없이 흐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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