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그는 가만히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반지하 계단은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습기에 젖어 곰팡내가 피어오르는 콘크리트, 꽉 닫힌 채 가만 자리 잡은 계단 위의 문 탓에 등골이 서늘했다. 그 문이 꼭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총살 직전 장교의 말이 귀에 맴돌았다. 장교는 새하얀 눈길 너머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기로 쭉 걸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입은 누비옷이 자꾸만 움직임을 방해했다. 곧 있으면 죽게 된다. 등 뒤의 사수에게서 쏟아지는 총알을 맞고 쓰러질 터이다. 흐른 피가 눈을 적셔가며 물들이곤 눈앞이 어두워져 갈 터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총알은 빗겨 난다. 다른 곳으로, 타인에게로 날아간다.
장교는 저 앞으로 나아갈 것을 명했다. 그는 나아간다. 눈 덮인 둑길이 황량하기만 했다. 나아가는 길은 살을 에는 듯이 추웠다. 하지만 이런 일말의 감각마저 얼마 안 가 저 멀리 흩어지고 사라져 갈 것이다. 눈앞으로 보이는 저 새하얀 눈마저, 마침내 의식마저 흐릿해지며 결국은 어두컴컴해질 터이다. 등 뒤의 사수는 방아쇠에 손을 올린다. 등 뒤에서 총성이 들려온다. 그는 걸음을 멈췄다. 가슴 언저리에 구멍이 뚫리곤 피가 흐른다. 뼈는 으스러지고 살갗은 찢어진다. 그러나 가슴을 에는 통증은 한순간 사라져 버렸다. 힘이 풀려 쓰러지지도 않았다.
그것이 빗겨나갔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발사한 총알이 사수에게로 날아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고함과 함께 통성이 들려왔다. 그는 다시금 다리를 움직여 저 너머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칼날이 되어 살갗을 찢는 바람을 가르며, 새하얀 눈덩이를 헤치면서 달음박질치기 시작한다. 등 뒤에서 연신 총성이 잇따랐다.
그러나 그것 하나가 제대로 날아온다. 눈먼 총알이다. 무거운 쇳덩이로 맞은 듯 충격이 전해지더니, 미처 다리를 멈추지도 못한 채 몸을 날리듯 쓰러졌다. 얼어붙은 눈 사이에 파묻혀 있으니 총알이 어디에 박혀 있는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흰 눈 사이 머리를 처박은 채, 총상에서 나오는 검붉은 피가 주변을 서서히 물들여가는 것을 느꼈다. 금방이라도 잠들 듯이 눈꺼풀이 무거워지곤 정신이 흐릿해진다. 인제 그만 눈을 감을 때가 다가온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