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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의 사소한 긁적임 Feb 13. 2023

바르셀로나에서 츄러스(Churro)로 생리통을 격파하다

바르셀로나에서 뺨 맞고 청혼받다 2편

때는 2018년 여름, 시차로 인한 수면부족에 딜러들의 접근으로 인해 영화에서처럼 멋진 바르셀로나 비치 클럽에는 얼씬도 못하고, 우리는 숙소에서 쿨쿨 잤다. 둘째 날 계획은 도시에 여기저기 랜드마크들을 구경하고, 맛집도 다니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를 (나를) 강타한 어마어마한 손님이 계셨으니, 그것은 스페인어로 período menstrual, 영어로는 aunt flo, 한글로는 생리통이셨다.


전날 잠도 잘 못 자고 여독 때문이었는지 생리통이 배, 허리부터 시작해서 몸 전체로 삭신이 쑤셨다. 오전에는 말도 못 할 정도로 너무 아파서 그냥 계속 숙소에 누워만 있었다. 초보 여행자라 약을 챙겨 오는 것도 까먹어서 약도 없이 미련하게 시름시름 앓았다. 한 오후 3시가 되자, 기운을 되찾았고 심각하게 당이 당겨왔다. 바르셀로나에 달달한 거 없어? 남편한테 물었더니, 남편이 웃으면서 "여기 츄러스의 나라잖아" 라고 말했다. 

Petrixol Xocoa, 츄러스 맛집이지만 사실 초콜릿으로 굉장히 유명한 곳

그 이후로 우리는 숙소 근처에 츄러스 맛집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나름 되게 역사 깊은 츄러스 카페를 찾아서 방문했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좋았던 경험 중 하나였던 츄러스카페. 안에는 고풍스럽게도 나무로 된 식탁과 의자 및 장식물들이 있었고, 초콜릿과 기름 향기가 오묘하게 섞여서 나의 후각을 자극했다. 자리에 앉았더니 김밥천국 같은 메뉴 지를 주고 여기에 먹을 거 체크해서 가져다주면 된다고 했다. 가격이 안 적혀있어서 좀 걱정은 되었지만 이성이 저 발 밑으로 떨어져 있던 나는 조금 달달하게 보이면 다 동그라미 치기 시작했다. 츄러스에 초콜릿, 크림, 커피, 등등... 가져다주니 직원이 초콜릿을 주문하면 츄러스가 추가로 나가는데 괜찮겠냐고 물어보았다. 나와도 한 두 개 나오겠지 하면서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해지는 항공샷

디저트카페이다 보니 식탁이 굉장히 조그마했는데, 우리가 시킨 주문은 조그마한 식탁을 꽉 채웠다. 츄러스들과 에스프레소 커피, 츄러스를 찍어먹는 초콜릿과 크림. 너무 근사하고 맛나보여서 생리통을 싹 잊게 하는 비주얼이었다. 츄러스를 롯데월드 말고 다른 곳에서 먹어본 적이 있던가? 너무 기분 좋은 낯설음이었다. 츄러스를 한 입에 배어무니, 설탕이 뿌려져서 오돌토돌하지만 달달하면서 바삭한 겉면과 밀가루와 버터의 조화를 보여주는 쫄깃한 식감이 아주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초콜릿에 찍어먹으면 얼마나 맛있게. 지구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에게 1인 1츄러스 보급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마치 중세 유럽의 귀족이 된 듯이, 남편과 나는 입을 모아서 옴뇸뇸 고급지게 먹는 척하면서 사진도 찍고, 왜 이렇게 평민처럼 먹냐고 서로 구박하며 장난도 쳤다. 

남편 폰에 저장되어 있는 내 프로필 사진. 왜 때문에?
남편한테 전화 오면 이 사진이 뜬다

가격은 절대 저렴하지는 않아서, 한 사람당 한 끼 식사 먹은 것처럼 나왔다. 하지만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몸이 완전히 다 회복하지는 않았기에 그 이후로 멀리 싸돌아다니지는 못했지만, 남편과 주변 레코드샵에 가서 희귀한 레코드도 득템 하고, 조그마한 성당에서 그르렁대는 고양이와 오후를 보냈다. 그리고 저녁으로는 타파스 집에 가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타파스 6개 종류를 먹고, 맛있는 샹그리아도 마셨다. 알딸딸한 채 숙소로 돌아오니, 생리통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몸이 싹 멀쩡해지더라. 

세젤맛 타파스.. 

생리통 때문에 오전시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는 없었지만, 생리통을 겪지 않았다면 츄러스와 초콜릿을 저렇게까지 영적으로 즐길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고, 생리통을 겪지 않았다면 나와 남편이 유명하지도 않은 레코드샵과 조용한 성당을 갔었을까? 생각이 든다. 사실 힘들게 시작한 날이었지만, 유명한 곳, 가봐야 할 곳 보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그날이 이끈 우연의 장소들이었어서 더 의미 있었던 것 같다. 이 날 세웠던 목표는 랜드마크를 돌아다니고 맛집을 가는 것이었는데, 랜드마크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장소라고 정의한다면 나름 여행목표를 이룬 날 아니었을까? ㅎㅎ..

성당 고양이와 H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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