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질병, 외로움
이번에 미국 정부에서 발표한 정책 중에 굉장히 신기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이 보였다. 바로 '외로움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었다. 발표에 따르면 외로움은 매일 담배 한 갑을 태우는 것과 같이 건강에 해롭다고 하고, 너무 많은 미국인들이 외로움으로 인해 조기 사망률이 30퍼센트 더 상승했다고 한다. 한국에 살면서 이 기사를 보았을 때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질병은 질병이고 외로움은 기분인데'라고 생각했겠지만, 미국에 사는 한국인으로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딱히 미국은 심각하고 한국은 괜찮아서가 아니라, 미국이 한국의 미래를 어느 정도 그려주는 것 같아서다.
나와 동년배인 80년대~90년대 미국 친구들 얘기를 들어보면, 뉴욕이나 샌프란 시스코와 같은 대도시를 제외한 미국 사회는 전체적으로 교회가 사회적 중심지의 역할을 해왔던 것 같다.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동네 사는 사람들과 인사하고, 서로 가족들의 근황을 묻고, 경조사를 서로 챙겨주는 등 교회 모임은 사실 종교에 대한 추앙심과 집단에 소속하고자 하는 마음이 뒤섞인 사회집단이었던 것이다. 여느 사회 집단이 그렇듯, 돈과 명예가 뒤섞여서 다양한 형태로 소속한 사람들이 착취를 하고 착취를 당하는 그런 일도 많이 생겨나면서 종교에 대한 진정한 의미가 퇴색하게 된 것 같다. 그러면서 현재 많은 내 동년배 친구들은 종교가 없는 경우도 많고, 종교가 있어도 교회라는 사회적 모임에 굳이 참여하지 않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종교로 설립된 미국과 다른 우리나라에게는 어떤 사회적 모임이 있었을까? 전문적 견해가 아닌 순전히 나의 경험상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가족 외의 사회적 관계는 학교에서 많이 시작하는 것 같다. 우리나라 학교는 특유의 담임반 제도가 있다 보니, 1년 동안 쭉 친구들과 계속 같은 반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싫어도 같이 붙어살게 되고,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서 종업식 때 롤링페이퍼 써주고 울고불고하는 거다. 하지만 어른이 돼서는 마음에는 존재하지만 물리적 거리가 멀어 못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서서히 마음도 멀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럼 물리적 거리가 가까운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교회 같은 사회적 장소가 우리나라엔 무엇이 있을까? 물론 우리나라 교회도 사회적 역할을 한다만서도,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가까운 동네에서 부담감 없이 타인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없는 걸까?
사회학에서는 제3의 장소(the third place)가 그런 장소라고 한다. 제1의 장소는 집, 제2의 장소는 직장이라면 제3의 장소는 사회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다. 시간과 돈이 많이 들지 않아 부담감이 없으며, 가벼운 분위기에서 타인과 대화를 하는, 그런 장소. 제3의 장소가 활발할수록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직접 보고, 나만의 생각을 털어놓으며 이 공간의 소중함을 느끼면서 시민의식이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내가 본 한 유튜브 영상에서는 종교적 모임, 가족 모임이 많이 사라지는 개인주의 사회에서 제3의 장소는 인터넷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레딧, 디스코드 등의 플랫폼은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제3의 장소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이런 가상현실에서의 교류가 과연 물리적 현실에서의 교류만큼 외로움을 진작시킬 수 있을까?
외향형 인간, 내향형 인간이라는 성격의 관점에서 살펴보기에는 인간의 외로움은 너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인 것 같다. 내향형 인간은 제3의 장소가 필요 없고, 집돌이로만 살면 행복하다? 그럼 내향형 인간은 단 한 번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나? 그건 아닌 것 같다. 하버드에서 '행복한 인생의 비밀'이라는 연구를 50년간 했는데, 행복은 관계로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내가 진심으로 마음을 전하는 사람, 나에게 진심으로 마음을 털어놓는 사람, 이 요소들이 결론적으로 행복하고 건강한 인생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화, 스트레스는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 치솟는 듯하다. 직장이 되었건, 가족이 되었건, 타인에 대한 믿음 또는 애정이 배반되었을 때 제일 상처받는 것 같다. 그렇다면 타인에 대한 의지, 타인에 대한 사랑이 생각보다 우리 인생에 필요한 거 아닐까? 인생, 그거 혼자 사는 거지라고 치부하기에는 타인이 너무 중요한 거다.
학교에서는 인공적으로 사람들과 만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 친구들이 항상 존재했지만, 직장생활을 하면서 '친구'를 새로 만드는 것이 생각보다 굉장히 힘든 일이라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내가 '친구'라는 거에 너무 큰 기준을 둔 것 같기도 하다. 나랑 마음이 통해야 되고, 정치관도 맞아야 되고, 이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했을 때 머리가 지끈거리지 않아야 하고 등등. 남자친구만큼이나 '친구'를 많이 재고, 기준에 조금이라도 안 맞으면 연락하지 않거나 연락을 피하거나, 했던 것 같다. 사실 나의 사회성도 문제이지만, 우리 가족한테 조금 빌미를 돌리자면, 우리 가족은 사교적인 가족이 아니었다. 암마아빠는 우리 집의 경제 사정이 안 좋아질 때면 다른 가족 만나는 것을 피했던 것 같고, 정말 필요한 가족모임이 아니면 다른 사람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경제적 사정이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우리가 넉넉해져야 사람들 만날 수 있어, 이게 우리 가족의 나름 사회성에 대한 철학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나는 집이나 직장이 아닌 다른 장소에 나오는 게 사치라는 관념이 뼛속깊이 자리 잡게 되었고, 타인에 대한 진심을 직장이나 남자친구에게 많이 쏟으면서 외로움을 해소했던 것 같다. 마치 나 자신에게 난 혼자가 아니야라고 주문을 외우면서 학교에서 아이들을 챙겼고, 남자친구에게 사랑을 쏟아부었던 거다 ㅋㅋ 그런데 한국에서 살면서 나는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동네에서 부담감 없이 가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없었다. 내가 동네 친구들이 없었던 것도 있고, 이 동네에서 맥주 한잔 하느니 버스 타고 서울 가서 멋진 핫플에서 맥주 한잔 하는 게 낫지 하며 동네를 무시했던 마음도 사실 있었던 것 같다. 제3의 장소는 나에게 사치니, 사치를 할 거면 제대로 된 사치를 해야지 생각을 하는 거다 ㅋ
그런데 미국에 와서 이 조그마한 동네 (내가 한국에서 살던 동네랑 별반 다르지 않은 크기 및 위치 등)를 보니, 호빗들이 모여 사는 샤이어 같이 우리 동네를 만들자는 사람들의 마음이 엿보인다. 우리가 자주 가는 단골 술집은 가장 싼 맥주 값을 10년여 동안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주변 지역에서 활동하는 밴드들 초대해서 커버차지로 많지는 않지만 계속 존재할 수 있는 이익을 거둔다고 한다. 사람들이 여기에 계속 와야 이곳의 문화적 의미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친구 한 명은 뉴욕에서 대도시 생활을 하다가 여기에 와서 가장 처음으로 시작한 게 탁구 동아리다. 보통 이런 동아리를 시작하면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게 돈이다. 장소를 빌려야 하니 집에서 나와서 탁구치고 싶어 하는 사람한테 입장비를 걷어야 하는 게 골치인 거다. 그런데 이 친구도 대단한 게, 텅텅 비어있는 상가를 보고 상가 주인한테 전화해서 설득했다고 한다. 이런 탁구 같은 활동에 사람들이 집에서 나와서 참여하는 게 바로 지역 경제가 활성화될 수 있는 방법이라고, 공동체 (community) 의식을 고무시킬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래서 상가 주인이 껄껄 웃으면서 전기세만 내라고 해서 한 달에 50달러 내고 당분간 탁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누가 오겠어? 했는데,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와서 탁구 치고, 다른 사람들 만나고, 끝나고 맥주 한잔 하러 가고 하면서 제3의 장소 기능을 한다. 무료로 어떤 활동을 한다는 게 정말 요즘 사회에서 생각보다 너무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 아닐까?
아무튼. 결론은 동네의 제3의 장소가 중요하구나, 요즘 들어 많이 느낀다. 사실 제일 쉬운 방법은 나에게 사회적 교류는 필요하지 않아라고 결론 내리고 가장 안전한 장소인 집 안에서 지내는 것 같다. 예전에 운동하러 주민센터 갈 때마다 가서 사람들 만나기 싫어서 끄응 소리 냈던 게 기억난다. 그런데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사람은 다른 사람과 오감이 뒤섞인 대화를 하고 정서적 교류를 하는 게 필요한 것 같다. 이번에 외로움 해소 미국 정책 중 가장 눈에 뜨였던 것이, 사람들이 부담감 없이 모일 수 있게 공적 장소를 마련하는 거였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나라도 주민센터에서 이런 시도를 많이 하는 것 같은데, 나만의 제3의 장소를 이번에 마련해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