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벅찬.
미국에서 또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남편이 여름에 인턴쉽에 참가하게 되면서 펜실베이니아라는 옆에 주로 여름동안 가게 되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오게 된 지 8개월밖에 안되었는데 지금 지내고 있는 아파트먼트에서 또 이사를 하게 되는 지경.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사실 그렇게 썩 맘에 들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미국 거주지를 정해놓고 와야 했기에 직접 보지도 못한 채 계약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기본 가구 (소파, 침대 등)이 갖추어져 있는 한국말로 하면 풀옵션인 곳으로 와서 가구를 구해도 되지 않아 몸은 편했지만, 여기에 사는 내내 아마존 택배상자도 갑자기 없어지고, 차 안에 물건도 한번 도난당하고, 세탁실에 항상 맴도는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등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들이 있었기에 마음은 항상 불편했다.
남편의 인턴쉽 덕분에 이 집에서 나올 수 있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너무 설렜지만, 어제 이런저런 짐을 정리하고 오늘 또 정리할 짐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또 한 번 깨닫는다. 이사라는 것은 정말 인생의 모든 부분이 마비가 되는 그런 큰 행사라는 걸. 한국에서 이사 올 때에 가구를 들고 올 수 없었기에 부모님 댁에 가구와 짐들을 옮기는 이사와 미국에 들고 갈 짐을 공항으로 가져가는 이사, 2번을 거쳤다. 그리고 8개월 만에 여기 미국 집에서 또 이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3개월 후 다시 이 동네로 돌아와야 한다 (새로운 집을 계약했다). 전생에 노매드였던가. 우리는 30대 디지털 노매드가 아닌 그냥 노매드다.
어제는 남편의 형이 와서 여기 집에 있는 가구를 친구집에 옮기고, 필요 없는 가구는 옆 동에 사는 친구 집에 가져다 놓는 작업을 도와주었다. 소파랑 매트리스쯤 내가 옮길 수 있다고 남편한테 떵떵거렸는데, 아무래도 내 체구가 믿을 수 없었나 본지, 그렇게 친하지 않은 형한테 연락해서 와달라고 했다. 어제 옆에서 남편과 형이 일하는 걸 보면서 생각이 든 게, 큰 가구를 옮기는 게 굉장한 의사소통이 필요한 작업이라는 거다. "왼쪽으로" "내 왼쪽? 너 왼쪽?" "내 왼쪽!" 등 ㅋㅋ 큰 가구 하나 옮기고 집에 들어와서 냉장고에 있는 맥주 하나 마시면서 둘이서 다음 작업으로 무엇을 할까 의논하는 모습을 보면서 조금 감동스러웠다.
남편의 형과 남편은 사실 굉장히 다른 두 사람이다. 남편의 형은 감정표현이 매우 풍부한 반면, 남편은 상대적으로 되게 절제된 사람이다. 남편의 형과 남편은 자라면서 취미도 달랐고, 친구들도 달랐다. 서로 같이 존재할 때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했을 때고, 둘만 있을 때 얘기하는 걸 들어보면 부모님이라는 학교를 10년 전에 졸업한 어색한 동창생 둘이 처음 만나 스몰토크하는 것 같다. 물론 남편이 한국으로 떠난 게 도움이 되진 않았겠지만, 둘은 '친구'라는 개념보다는 '가족'이라는 개념이 더 지배하는, 그런 관계.
그런데 이사라는 것 자체가 이사 전의 인생의 모양을 돌아보게 되고 이사 후의 미래를 그리게 되는 행동 아닌가. 남편과 형이 가구를 옮기면서 이 가구를 어떻게 썼었는지, 다음엔 어떻게 쓸 건지에 대해 저절로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인생에 대해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하는 게 엿보였다. 아 이 가구 비슷한 거 부모님 집에도 있는데, 남편이 한국에 있을 때 아버지가 많이 좋아했었는데 버리게 되었다, 등. 엄청난 육체적 노동이었지만, 남편 형과 남편은 생각보다 많이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가구 정리가 끝난 후 어느덧 저녁 7시가 되었고, 우리는 남편 형과 중국 음식을 먹고 헤어졌다.
한국에서 이사했을 때에도, 결혼 후에 조금 소원해졌던 엄마아빠와 큰 딸인 나의 관계도 조금 돈독해졌던 것 같기도 하다. 서른 살 먹은 딸이 엄마아빠한테 도와달라고 하는 게 스스로 염치없다고 생각했지만 스스럼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도와주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이게 바로 '정'인가? 생각했다. 20대에는 ''정'이라는 걸 어떻게 정의할 수 있어? 매일 연락하면 정을 붙인 거야? 그런 게 어딨어. 인간은 혼자 사는 거지. 내가 정을 붙여봤자 다른 사람이 나한테 정 떨어지면 그게 끝인 거다"라고 되게 (상처받기 싫어서) 결론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조금씩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긍정적인 경험이 쌓이면 쌓일수록, 이런 '정'이 더욱더 소중해지는 듯하다. 나이 들면 들 수록 이런 인간관계가 희소하다는 걸 깨닫게 되니까.
미국에 오니 여기도 그런 개념이 있더라. 감히 번역을 하자면 'genuine human connection' 비슷한 것 같다. 절대적인 기준은 없으나, 마음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 이사라는 인생 행사를 거치면서 내 인생의 사람들과 정을 쌓게 되니, 몸은 힘들지만 마음으로는 벅찬다. 펜실베이니아에서도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