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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y의 사소한 긁적임 Jun 26. 2021

우정이 필요해요

영화 <알라딘>은 사랑영화가 아니였다

벌써 학기말이 되었다. 지필고사(흔히 말하는 기말고사)가 끝나면 아이들의 집중력은 현저히 낮아지기 때문에, 시험이 끝나는 대로 나는 아이들이 방학전까지 수업시간에 깨어있을 수 있도록 특색있는 수업을 준비하곤 한다. 특색있는 수업이라 하면 영어교사에게는 특권이 있다. 팝송, 영화, 미드 등 우리 세계에는 영어로 된 주류 미디어가 넘쳐나기 때문에 무한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Speechless 노래가 나온지 꽤 되었는데도 요즘 흥얼거리는 모습을 보고, 1992년에 나온 알라딘 영화로 한번 수업을 해볼까 싶었다. 2019년에 나온 영화는 1992년에 나온 만화 <알라딘>을 리메이크한 것인데, 요즘 아이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오 주여. 1992년에 출시된 만화영화 <알라딘>은 내가 초등학생 때 매우 즐겨보곤 했다. 사실 나는 디즈니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몇 번씩 돌려보면서 대사를 외우고 다녔다. 사실 이러한 경험이 쌓여 영어라는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언어를 배울 때 '흥미'보다 강한 동기는 없기에, 나는 예전의 추억도 되살릴겸, 아이들에게 흥미를 바탕으로 한 수업을 기획할 겸, 1992년에 출시된 2D 애니메이션 <알라딘>을 시청하기 시작했다. 

1992년 작 <알라딘>


우리가 표면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영화라는 것은 관객은 앉아있고 감독이 구성한 컨텐츠를 수용하는 일방적인 미디어라고 볼 수 있으나, 사실은 관객이 어떤 배경지식 또는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영화를 이해하는 바는 참 많이 달라지곤 한다. 12살의 내가 알라딘을 보고 영화에 대해 이해한 바와, 현재 30살의 내가 보고 이해한 바는 정말 180도 달랐다.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알라딘은 흔히 디즈니 공주와 왕자의 결혼성공스토리라고만 볼 수 없었다는 거다. 리메이크 된 2019년 작에서는 연애이야기가 오히려 조금 위축되어있을 정도로 다른 스토리라인이 도드라져 있다. 아마 1992년 작의 알라딘에서 다양한 층의 이야기들이 소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러브스토리라고만 볼 수 없는 알라딘


먼저 <알라딘>은 자아를 구성하는 자유의지, 그리고 자아를 찾아나가는 탐험의 이야기다. 먼저 알라딘은 스스로 '가난한 거지 알라딘'이라는 자아에 대해 거부하며 지니의 도움을 받아 '왕자 아바브와'로 자아를 채택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어울리는 역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거짓되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과 타인에게 진실한 알라딘'이라는 자아를 채택하게 된다. 또한 지니는 은하계를 컨트롤할 수 있는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있으나, 자유의지가 없다. 지니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어도 그 힘을 원하는 대로 쓸 수 없다는 딜레마에 시달리며, 자신은 권력이 필요없으니 자유의지를 가지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자스민. 자스민은 돈과 권력을 가지고 있으나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다양한 법과 규율로 인해 행동이 매우 제한된다. 1992년 작에서 (아주 잠깐) 자스민은 '나는 이길 수 있는 상품이 아니에요. 왜 남들이 내가 결혼하는 남자를 정하고 있죠?'라고 말하며 (아주 살짝) 페미니즘의 네레티브를 비추고 있다. 하지만 알라딘과 지니와는 달리 자스민의 자아탐색에 대한 갈등은 1990년대 작에서는 해소되지 않는다. 허나 2019년작에서는 자스민의 감정과 의견을 주로 다루면서 이러한 아쉬운 점을 달래고 있는 듯 하다.

2019년 작 알라딘 영화의 주인공(protagonist)이라고 볼 수 있는 자스민


두번째로 <알라딘>은 이타적인 우정에 대한 이야기다. 비록 지니는 알라딘의 소원을 들어주는 수단의 역할을 하고 있으나, 이 둘은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서로 도와주고, 서로 약속을 하고, 서로 싸우기도 하며 서로의 감정을 공유한다. 지니는 알라딘이 '왕자 아바브와'가 아닌 '알라딘' 자신에 대해 관대해질 수 있게 격려하고, 알라딘은 지니에게 스스로가 될 수 있도록, 즉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도록 조력한다. 지니가 알라딘을 도와주는 부분은 물론 이야기의 장치로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지니가 알라딘을 조력하는 부분에서는 진정하게 알라딘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보인다. 게다가 알라딘은 자파처럼 세상의 모든 권력을 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니를 위해 마지막 소원을 사용한다. 현대인 관점에서는 주인공의 선택이 참 바보같고 영화니까 가능한, 그런 비현실적인 내용이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서는 절실하게 필요한 가치이지 않을까 싶다. 현재 우리는 극단적으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만 받아들이고 그 외의 사람들은 선을 그으며 '노이해'라고 단정하며 이해하기를 포기한다. 서로를 이었던 끈은 다양한 이유로 방어기제가 발동하며 끊어지고, 인간관계는 점점 더 좁아진다. 타인의 선행으로 보이는 것은 의심하는 것이 당연지사며, 내가 선행을 할 때에도 타인이 의심할 것 같으니 주저하게 되는 그런 세상. 누구를 싫어하는 이야기가 누구를 사랑하는 이야기보다 조회수가 많아지니, 세상의 많은 이야기들이 혐오의 네레티브로 이루어지는 그런 세상. 이러한 세상에서는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적어지고 싸워야 할 사람들은 많아진다. 생각보다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많이 없기 때문에, 서로 모여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해결되기 굉장히 힘들어진다. 서로를 파멸시키기 위해 이렇게 강하게 노력하는데 인류에 대해 썩 좋지 않은 결과가 필연적일 것 같다.

자극적인 혐오가 조회수를 올려주지요

이렇게 다양한 이유로 분단되어 있는 세계에서, 서로에게 신뢰를 주고 받으며 우정의 관계를 쌓아가는 행동이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정말 바보같지만, 정말 말도 안되는 거지만, 서로의 자아를 찾아나가게 해주고 서로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그렇게 바보같다고 생각된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이 우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아닐까? 누가 아는가. 신뢰와 우정을 통해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면 A Whole New World가 펼쳐질지. 


<쓰면서 새로운 깨달음>

*A whole new world가 단순 사랑 노래가 아니였을 수도 있겠다.

**이번에 새로 나온 Raya and the Last Dragon도 이러한 메시지를 공유하고 있는 것 같다. 1992년에는 알라딘이 지니를 위해서 소원 하나를 포기하는 게 그렇게 바보같아보이지 않았는데, 이번에 Raya는 진짜 바보같아 보였다. 세상이 많이 척박해지긴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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