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백수 일기
오늘은 서울대 교보문고에서 이기주 작가의 신간 "그리다가, 뭉클"을 집어 들었다.
작가 이름도 익숙했고 페이지마다 멋진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에 와서 보니 내가 읽었던 "언어의 온도" 작가였고, 그럼에도 수준급 다작이어서 놀랐다.
뭔가에 쫓기듯 항상 대충 그리다 마는 백수로서는 찔리지 않을 수 없었다.
글과 그림에 빠져 들어 읽다가 내 가슴에 쿵하고 와닿는 구절이 있었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속 김희성 대사 "내 원체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좋아하오. 달, 꽃, 별, 웃음, 농담, 이런 것들."를 언급하며 낭만에 대하여 얘기했다. 낭만은 무용한 걸 굳이 하는 것이다.
당장 먹고사는 일에 쓸모가 없어도 아름답고 무용한 것을 하는 것..
그림은 낭만이다. 작가가 그렇게 많은 시간을 쏟아부어 정성스레 페이지마다 그림을 채운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내가 그림에 시간을 쏟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나는 현실에 비중을 더 두고 있음이다.
아내가 일을 하고, 아이들도 치열한 삶을 준비하고 있는데 나 혼자 딴 세상으로 가는 듯한 불안감이다.
어차피 돈도 못 벌면서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무용한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이렇게 시간을 투자해서 나중에 뭔가가 되지 못한다면 허송세월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다. 한편으론 내 인생의 아름답던 기억들은 대부분 무용한 일들이었던 것 같다.
십 대, 이유 없이 목숨 걸고 산 봉우리를 올랐던 일. 이십 대, 결국 포기할 사시를 죽어라 했던 일.
삼십 대, 어머님 밭일을 열심히 돕던 일. 사십 대, 없는 살림에 자비 출판 하던 일..
어쩌면 중년 이후에는 무용한 것들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