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백수 일기
토요일 오전에 아내를 교회에 내려주고 차를 달려 도곡동 매봉산으로 갔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매봉산 둘레길을 걷고 산에 오르는 것이 집에서 아내를 기다리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이었다. 산 아래 아파트 상가 부동산을 지나치다 보면 삼십 중반 공인중개사를 시작하던 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매봉역 뒤 조용한 동네 어귀를 가보면 아침마다 부동산 앞을 쓸고 거리에 물을 뿌리던 내 모습이 보인다.
20년이 지났어도 간판이 그대로인 부동산 앞을 가보면, 마치 고향에 금의환향한 사람인양 기분이 묘해져
가끔 등산 핑게로 찾게 된다. 사실 그곳에서 얼굴 사장으로 부동산을 할 때는 매봉산이 좋은지도 몰라 제대로 한 번 올라가 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산 아래 빌라 촌에 주차를 하고 산을 돌아 정상에서 운동을 하고 내려오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오는 길에 홈플러스 장을 보고 집에 먹거리들을 쟁여 놓고 있다 보니 2시까지 교회 카페로 오라는 카톡이
왔다. 가보니 반가운 부부들이 기다리고 있어 즐겁게 커피를 마시고 교회를 나왔다. 다음 코스는 아내 쇼핑을 위해 붐비는 잠실 롯데몰에 가는 일이었는데 결국 내 신발만 득템하고 신이 나서 돌아왔다.
저녁때가 되니 큰 아이가 돌아왔다. 어딜 갔었는지 물어도 말 않던 아이가 오늘 아침 안방에 들어와 얘기를 풀어놓는다. 다음 주 주말부터 빵집에서 알바를 하는데 어제 미리 가서 오후 내내 실습을 했다는 것이다.
매니저님도 좋고 끝날 때는 그날 팔던 빵을 얼마든지 갖고 올 수 있다는 말에 신이 나 있었다. 대학교 내내
과외 알바를 했었는데 이제는 아무 생각 없이 몸 쓰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주말에 자신이 즐겁다며 쿠키 만드는 곳을 찾아 봉사활동을 하더니, 이제는 주말 내내 최저시급 알바를 자처하는 아이가 놀랍고 신기했다. 아마 주말에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단 밖에서 몸을 힘들게 하는 것이 훨씬 보람된 일이라는 사실을 봉사 활동을 통해 깨달은 것 같다.
한편 기특하기도 했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백수 아빠로서는 미안함도 따라왔다.
주일이 충만한 것은 아침에 일어나 예배를 준비하고 교회에 나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일찍 예배 자리를 잡고 한주를 돌아보고 좋은 말씀을 들으며 교제를 나누고 돌아오니 하루가 꽉 찬 것 같다. 다음 주 토요일부터는 우리도 아무 생각 없이 몸 쓰는 일을 해야 할 것 같다.
이제 날씨도 좋아지니 아내와 한강을 달리거나, 주변 산들을 하나씩 모두 올라가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