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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Aug 23. 2024

커터칼 부부싸움

결혼 18년 차 일기

커터칼 부부싸움    2018년 5월 30일

 

 어제는 아내와 청담동 고시원 도배를 했다.

고시원이 7년 정도 되자 방들 벽지가 더러워져 공실이 생기면 아내와 도배를 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풀 바른 벽지를 구매해 직접 하는데 방 하나에 삼만 원이면 되고 1시간 정도가 걸린다.

처음엔 엄두가 안 났지만 자꾸 해보니 별 어려움도 없고 하루가 금방 가서 재미도 있다. 

그런데 어제는 아내와 네 시간가량 도배를 하면서 어이없는 일로 싸우기 시작해 하루를 망칠 뻔했다.


 도배할 때 커터칼을 쓰는데 아내는 앞 칸만 자르자고 하고, 나는 새 날로 갈자고 주장하다가 싸움을 했다.

 "제발, 내 말 좀 들어... 왜 그렇게 말을 안 들어!"  

도배를 할 때 가장 불편한 점은 칼날이 무뎌져 도배지가 깔끔하게 잘리지 않는 것인데, 마침 사용하지 않던 새 커터 칼날 한 박스를 발견해 나는 그걸 최대한 사용하고자 했다. 그런데 아내는 앞 칸만 자르면 되는데 왜 낭비하냐며 몇 번의 내 얘기를 무시하자 그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아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어쨌든 남편이 바꾸자는데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아내가 답답하고 야속했다.


 다행히 아내는 한참 동안 침묵으로 일관했고, 나도 시간이 지나자 잠도 못 자고 불려 나와 점심도 못 먹고 도배를 하고 있는 아내가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어젯밤에 막내 과제 때문에 새벽 3시가 넘어 잤고, 한 시간도 못 자고 4시에 일어나 첫째 수학여행을 보내느라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나도 요 며칠 소화가 안 돼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새벽에 수학여행 바래다주느라 잠을 설쳐서인지 신경이 예민해져 신경질이 났던 것 같다.


 이렇게 정말 누구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이유로 싸움을 자주 한다.

이렇게 사소하고 둘 다 똑 같이 맞는 말을 하면서 싸움을 한다.

아내 말도 틀린 게 하나도 없으니 아내는 남편이 이해가 안 될 것이고, 나도 남편 말을 기어코 따르지 않는 아내가 좀처럼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아까 그 상황에서 아내가 어이없는 내 신경질을 맞받아 쳤다면 우리 부부의 도배는 중단되었을 것이다.

어디 이런 일이 이것뿐이겠는가? 아니 모든 일상이 다 이런 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대화 속에서도 서로 원망하며 싸우니, 서로의 가치관이 투영된 결정이나 가정의 대소사에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하루하루 행복한 부부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초보자들의 도배만큼이나 힘겹고 어려운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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