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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Jun 12. 2023

이쪽이 꿈이 아니라 저쪽이 꿈이었네

3개월 간 유럽에 다녀왔다. 이 글은 한국에 돌아온 뒤로 바라본 거의 모든 것들에 관한 이야기다. 모든 것은 <정말?>에 가까웠다.


1. 정말


- 물이 정말 깨끗하구나.

- 사먹지 않는 물은 정말 좋은 것이구나.

- 와이파이가 정말 빠르구나.

- 그래서 취소할 틈도 없이 사진이 정말 빨리 가는구나.

- 내 집에서의 샤워란 정말 좋구나.

- 내가 쓰던 샴푸가 정말 남아있구나.

- 우리집 치약은 정말 맛있구나.

- 내 욕조란 정말 믿을 만하구나.

- 잘 세탁된 수건 냄새가 정말 좋다.

- 동네에서 나는 냄새가 정말 좋다.

- 남자친구 냄새가 정말 좋다.

- 나는 정말 후각적인 사람이구나.

- 습한 공기가 정말 좋다.

- 떠도는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어서 정말 좋다.

- 음식을 금방 주문할 수 있어서 정말 좋다.

- 한식은 정말 오랫동안 배가 부르구나.

- 한국인들은 정말 표정이 없구나.

- 정말, 동유럽에서 서유럽 가는 것보다 유럽에서 한국 온 게 더 충격적이다.

- 선풍기와 에어컨은 정말 편리하고 탈자연적이구나.

- 빵과 커피가 정말 비싸구나.

- 뜨거운 라떼는 양만 많고 정말 맛이 없구나.

- 건물들이 정말 높고 무채색이구나.

- 살이 정말 쪄버렸구나.


2. 돌아오자마자


이보다 무수히 많은 물음표들을 끌어안은 채로 나는 돌아왔다. 우선은 집에 와서 남자친구를 만났고, 아빠와 동생을 만났다. 남자친구는 전보다 야위어있었는데 내 얼굴은 좀 더 동그래졌다. 오빠는 내가 얼마나 잘 먹고 다닌 거냐며 자꾸 내 배를 만졌다. 처음엔 조금 빡쳤지만 그냥 좀 더 귀여워졌을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빠는 나를 처음 보고 끌어안았다. 사실 끌어안기보다는 가볍게 안은 쪽에 가깝지만, 내가 처음 떠날 때 안아주었던 그대로였다. 우리는 내가 스무살이 된 이후로 안아본 적이 없는데, 올해만 벌써 두번째이다. 내 여행이 나만큼이나 아빠에게도 아주 큰 변화였던 것 같다. 동생은 그냥 가볍게 인사만 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이제 내가 타국에서부터 열심히 챙겨온 선물들을 나눠줄 차례였다. 가장 많은 몫은 단연 남자친구였다. 나는 정말 좋은 여자친구라고 생각했던 게, 내가 들렀던 국가와 도시마다 엽서를 사서 그에게 편지를 썼기 때문이다. 엽서들이 너무 예뻐서 편지만 보여주고 내가 가질까 고민했으나, 편지 뭉치를 보고 거의 울 것처럼 감동한 남자친구에게 모두 헌납하기로 했다. 그러라고 가져온 이야기들이었으니까.


그 편지들에는 나의 희노애락이 담겨있었다. 한 도시에서 느낀 것들이 어떻게 엽서 한 장에 요약될 수 있겠느냐만은, 짧은 지면에는 대체로 중요한 것들만 담겨 있기 마련이니까. 나도 언젠가 먼 일기처럼 그 편지를 다시 꺼내볼 수 있겠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썼다. 인스타와 블로그는 가질 수 없는 소중하고 비밀스러운 것들이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제 소중하고 비밀스러운 사람의 손에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 바로 해야할 것들이 있었다. 이를 테면 이슬아 작가의 북토크에 당첨된 것, 사실 당첨보다는 채택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그가 내 사연을 직접 읽고 나를 불러준 것이니까. 들어보니 약 300여개의 사연이 접수됐다고 한다. 북토크에 모이게 된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보냈을지 궁금해졌다. 아마 작가님도 그게 궁금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이야기들과 우리의 얼굴을 자꾸 맞춰보게 된다고 했다.


북토크는 물론 서울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서울에 집이 없는 나는 친구 자취방에 하루 신세를 지기로 했다. 너무 친한 친구들이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있었던지라 어쩐지 떨렸다. 아직 시차적응도 되지 않고, 비행기에서 먹은 기내식도 소화되기 전이었다. 나는 더부룩한 배와 몽롱한 정신으로 친구들과 상봉했다.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자취방은 벽이 얇을 것이고 속도 좋지 않았으니 꾹 참았다. 야식으로 함께 먹은 막창과 볶음밥은 정말 눈물나는 맛이었다.


3. 유지보수


금요일에 입국한 뒤 격동의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이 되었다. 서울에 다녀왔고, 남자친구와 친구들과 가족들과 교회 사람들을 만나고 왔으니, 이 조용한 월요일이 내게는 진짜 시작이 되겠다. 이제 진짜 생활이란 게 시작될 참이었다. 오늘 해야할 목록들을 쫙 정리해두었으나 오후 2시에 기상해버렸다. 아직 시차 적응이 되지 않은 탓이다.


아무래도 유럽에서 익숙했던 것들, 이미 몸에 밴 것들을 다시 돌려놓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았다. 그것들을 유지보수라고 한다면, 나는 당분간 유지보수 생활인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한국 생활에 완벽 적응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바꾸고 적응시켜야만 하니까. 그 대상은 다음과 같다.


- 네일아트가 다 벗겨지고 몇 개는 아작난 손톱

- 캐리어 무게 때문에 버려야만 했던 블루투스 키보드

- 유럽에서 탈탈 털고 온 돈

- 반대로 매일 빵을 먹다가 불어버린 살

- 다소 유럽스러운 옷들과 선글라스

- 소매치기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 유럽 시간에 맞춰져버린 생체 리듬


요약하자면 손톱과 키보드, 돈과 살, 옷과 선글라스, 불안과 생체 리듬이다. 다 따로인 것 같지만 내게는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들이다. 벌써 해결된 것에는 키보드가 있다. 쿠팡에서 접이식 키보드를 하나 샀는데 로켓배송이라 벌써 받았기 때문이고, 디자인이 너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접이식이라 얇고 작아서 손에 익으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테면 ‘ㅠ’를 왼손으로 눌러야 한다는 것. 물론 키보드 외의 것들은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한국에 돌아오면 쓰고 싶은 글과 하고 싶은 일들을 미리 정리해두었다. 유럽에서부터 꽤 오랜 시간에 걸쳐 생각해온 것들인데, 대체로 글에 대한 아이디어는 번뜩번뜩 생각날 때마다 기록해둔 것이다. 아마 그것들을 찬찬히 해나가는 한해가 될 것 같다. 사실 글을 쓴다고 해도 객관적인 상태는 백수이기 때문에, 이런 불안정한 상황이 매우 불안하기도 하지만 그냥 불안 속에서 춤을 추기로 했다.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나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차피 불안할 거라면 글이라도 쓰면서 불안한 게 낫지 않나 싶기 때문이다. 유럽과 한국, 어느 때는 양쪽이 번갈아 꿈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한국이 좋아지고 편해지고 익숙해질 수록 확실히 저쪽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믿게 된다. 내 인생의 3개월이 그리 짧지는 않았지만 이쪽에서 보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으니까. 둘다 진짜이지만 한쪽이 꿈이라면 무조건 저쪽일 테니까.


저쪽 일이 내게 이쪽 일이 되기를 자꾸 바란다. 무엇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전에 그냥 다 현실이라고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꿈 같은 일들이 자주 현실처럼 일어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정말 꿈 같다. 내가 죽도록 싫은 날에도 그들이 있어서 자주 그런 현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이쪽과 저쪽이 자주 뭉개지는 삶을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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