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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Jun 30. 2023

파주에 오면

이름만 들어도 가끔은 떨리는 도시, 파주에 왔다. 출판도시라는 컨셉이 너무 좋아서다. 오늘로 두번째 파주, 두번 모두 남자친구와 함께 왔다. 청주에서 약 세시간 정도 걸렸다. 역시나 내가 검색했을 때는 두시간이라고 했는데, 출발 직전에 네비게이션을 찍으니까 세시간이라고 나온다. 어째서 매번 나의 예상 시간은 실제를 비껴가는가. 조금 미안하지만 내가 도로사정을 개선할 수는 없으니 그냥 헤헤 하고 웃는다. 이런 허술함도 귀여워해주기를 바라면서…


처음으로 레인부츠를 꺼내 신었다. 오늘은 비가 오지 않지만 내일은 비가 올 것이므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예비하는 자의 발걸음은 조금 무겁다. 아주 파란 티셔츠와 조금 하늘색인 레인부츠가 부끄럽기 때문이다. 내일은 꼭 비가 오기를 바라면서 수상해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오빠를 기다리는 동안 아파트 벽을 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더 수상했을 것 같다. 상관도 없고 얼굴도 없는 남의 시선에 초연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아직도 너무 과도한 나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 같다.


어제는 동기들과 파자마 파티를 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괜한 것들이 다 웃겨서 깔깔마녀가 됐었다. 그러면서도 갑자기 진지해졌다가 또 갑자기 터무니없이 웃기기를 반복했다. 이 애들은 서로 앞에서 잘 풀어지고, 솔직한 데다가 주관이 확고해서 좋다. 서로를 자꾸 웃기고 또 웃겨 해서 좋다. 나는 그 애들만큼이나 많이 웃지는 않았지만 그냥 웃음이 떠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행복을 누렸다. 꽤 오래 갈 것 같은 얘네랑 내가 좋아하는 중고서점엘 갔다. 거기서 사온 책 중에 하나가 ‘출발선 뒤의 초조함’이었다. 파주에 오는데 책을 세 권이나 가져왔다. 모두 어제 중고서점에서 산 것들이다. 얼마나 읽고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지금 옆에 펼쳐져있는 건 박참새의 대담집인데, 첫 게스트가 김겨울이고 다중자아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의 아주 많은 사회적 역할들을 그렇게 불렀다. 유튜버이자 작가이자 디제이이자 진행자…… 말고도 더 있다. 그 중에 두개만 하라고 해도 나는 벅찰 것 같았다. 그렇게 대단한 삶을 연속적으로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어서 세상이 더 다채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각기 다른 역할이 한 인간을 통과하며 새로운 흐름으로 이어질 테니까. 그렇게 단단해진 자아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결국은 사회를 건강하게 할 거라고 믿게 됐다.


나는 우선 사회를 건강하게 해보기도 전에 내 정신을 먼저 챙겨야 하겠지만. 요즘 그런 생각을 하기는 한다. 내가 오로지 나만을 위해 글을 쓴다면 너무 치사한 것 같다고. 더 많은 사람을 위해 내 힘을 쓰고 싶은 마음이다. 글 쪽으로 다중자아가 되기도 전에, 이미 나는 어떤 면에서 다중자아로 살고 있는 것도 같다. 여러 친구들과의 각기 다른 만남에서 나는 모두 다른 버전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 중에는 조금 더 나답지 못한 모습도 있어서 문제이다. 그렇게 나를 소비하고 나면 꽤나 지쳐버린다.


가끔 나는 나를 갈아끼우고 싶을 때가 있다. 여러 사람들의 첫인상 속에서 나는 밝은 사람이다. 남자친구도 나를 알기 전에는 아주 시끄러운 사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에는 한없이 진중해지고 싶다. 사실 진짜 내가 드러나는 건 아주 진지한 대화에서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고민, 삶의 방향, 관계의 어려움을 말하는 내가 진짜 나같다고 느낀다. 그러다 너무 진지해질 때쯤에는 다시 자아를 갈아끼우고 싶어진다. 한없이 가볍고 장난스러운 나, 실없이 웃어버리는 사람으로 말이다.


물론 어느 한 쪽만 나라고 할 수는 없다. 퍼센트로 따진다면 진중자아가 70, 깔깔자아가 30 정도…… 두 쪽을 적절히 오갈 수 있어야 건강한 정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 같다. 만약 나를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생각하고 있다면, 언젠가 실망하게 될 것이다. 조금 실망해도 좋다. 실망했다는 건 벽이 허물어졌다는 뜻이니까. 그런 뜻에서 누군가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놀라는 건 나쁜 일이 아닐 거다. 미처 몰랐던 자아의 맞은편을 마주하게 된 걸 테니까.


당신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했을지 궁금하다. 아마 글로만 나를 만난 사람들은 한없이 진중하고 무거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오해를 바로잡을 생각은 없지만 어디까지나 세상 속의 나는 다른 얼굴로 존재하기도 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중자아로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점도.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오해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 오해가 때로는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내일은 파주 출판도시 서포터즈 발대식이 있는 날이다. 그것 때문에 이 먼 곳에 와 있다. 온 김에 2박 3일 동안 읽고 쉬고 쓸 예정이다. 너무 멀리 와서 아주 달라진 풍경을 보니 조금 설레기도 한다. 변화는 새로운 마음을 몰고 온다. 아주 매콤한 오징어불고기를 먹고, 숙소에 있는 철권 게임을 했다. 뿌요뿌요와 마리오도 했다. 모두 나의 유년시절에는 없던 것들인데, 남자친구는 이 게임의 매커니즘에 아주 빠삭하다. 어떻게 하면 숨은 필살기를 쓸 수 있는지 그는 알고 나는 모른다. 필살기를 쓸 줄 아는 사람 앞에서 기본기만 갖춘 나는 속절 없이 무너진다. 열 번 중에 한 번밖에 못 이겨서 억울했지만, 금방 까먹어버린 걸 보니 게임에 특화된 성격은 아닌 것 같다.


이럴 때 보면 나의 진중 자아가 오랜 세월 동안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는 침대에서 게임을 하고 나는 머리를 요리조리 굴려가며 글을 쓴다. 내 글은 꽤 오랜 시간 남겠지만 그의 오늘치 행복감을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나는 성취로 움직이고 그는 재미로 움직이는 사람인 것 같다. 각자가 원하는 것들을 하며 보내는 시간이 참 소중하다. 어쨌든 내일은 꼭 비가 왔으면 좋겠다. 수상하지 않게 마음껏 레인부츠를 신을 수 있도록. 그러고 보니 처음 파주에 왔을 때도 비가 왔던 것 같다. 내게 파주는 흐린 날이 전부일 테지만, 어차피 남의 단면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거니까 아쉽지는 않다. 조금 오해한 채로 내버려두는 것도 아름다울 것이다.



2023.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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