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열음 Oct 19. 2023

넘고 넘어지는 것들

‘종이잡지클럽’에 처음 방문한 건 지난 여름이었다. 그 계절 동안 나는 청주에서 파주를 오가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물론 매일은 아니고 월 4회 정도... 왕복 6시간의 여정이었다. 집에서 남부 터미널까지 한 시간 반, 터미널에서 합정까지 오십 분, 합정에서 파주까지 사십 분이 걸렸다. 왕복 6시간을 오가는 동안 이 일이 얼마나 가치로운지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그래도 언젠가 여유가 생기는 날이 오면, 합정에서 시간을 보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파주에 가려면 합정을 꼭 들러야 했기 때문이다. 서울에 대해 아는 건 쥐뿔도 없지만 내게는 서울을 잘 아는 친구들이 있었다. 시골 쥐인 나는 최근 읽었던 “합정과 망원 사이”라는 에세이를 참고해 가고 싶은 곳을 하나 찜해두었을 뿐이다. 그곳이 바로 ‘종이잡지클럽’이었다.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건전한 클럽으로, 합정역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입구를 잘 찾아 지하로 내려가면 엄청난 냉기가 뿜어져 나온다. 잡지에 대해 무엇도 모르지만, 걔네를 쾌적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냉방력이 필요하다는 걸 직감했다. 더운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종이를 위한 온도라는 걸 알았다.


어찌 됐든 나는 무척이나 땀에 절어 있는 인간이었으므로, 기쁜 마음으로 그곳에 입성했다. 하루치 입장권을 내면 엉덩이가 납작해질 때까지 앉아 잡지를 보다 갈 수 있는 구조였다. 1인 소파석도 있었는데 저녁 언저리에는 딱딱한 단체용 의자만 남아있었다. 글을 쓰려면 딱딱한 의자가 좋다. 푹신한 의자는 글이든 몸이든 생각이든 퍼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읽으러 왔다. 본격적으로 읽기만을 위해 앉는 건 오랜만이었다.

세월감이 느껴지는 잡지도 있고, 누가 봐도 새것인 잡지도 있었다. 잡지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평소 관심 없던 분야를 괜히 뒤적거리다, 결국은 문학 쪽 잡지를 몇 권 가져왔다. 한 번에 너무 많이 가져오면 빠르게 읽어야 할 것 같았으므로 세 권만을 챙겼는데, 그것이 <글리프 최은영 편>, <책 만드는 곳, 출판사>,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글리프는 문학 작가들을 본격적으로 덕질하는, 새로운 형태의 독립출판 잡지다. 최은영 작가와 김초엽 작가 편이 있었는 데, 최근 읽은 소설 “쇼코의 미소”를 생각하면서 최은영 작가 편을 골랐다. 그것이 글리프 7호이다. 부록으로는 ’모의덕력평가‘라는 모의고사 형식의 시험지가 꽂혀 있었다. 이 작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인데, 무척 귀여웠다. 그리고 그 시험지를 대충 훑어보자, 나는 최은영 작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과연 이 책을 덮은 후에는 몇 점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쇼코의 미소>에서 얻은 작가님에 대한 인상은, 분명 누군가를 돌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돌보는 사람만이 돌보는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글리프를 통해 본 최은영 작가는, 문학인에게 사랑받는 문학인 그 자체였다. 글리프의 시선과 언어가 따뜻해서 벗어나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가만히 두었다. 이들이 바라보는 최은영 작가가 내게 그대로 흘러 오도록 내버려 두었다.


최은영이 그리는 인물들은 편치 않은 자리에서 자신만의 싸움을 이어 나가는, 그러나 텅 비어 있지는 않은 사람들 같다고 생각했었다. 결핍이 있지만 결코 공허하지는 않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풀어내는 최은영 작가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의 비밀스러운 속내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잡지를 읽을수록 더 그랬다.


아무래도 작가는 자기를 조각내서 스토리를 풀고, 인물들을 쌓아나가고, 글을 쓴다면 잡지는 그런 조각들을 모아 작가를 재구조화하는 것 같았다. 글리프뿐만이 아니더라도 잡지는 실제 인물들을 가능한 새롭게, 솔직하게, 다양하게 풀어내는 매체가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잡지가 소설이나 에세이보다 상위의 예술일지도 모른다. 이미 존재하는 누군가를 새로운 시선에 따라 다시 조립하기 때문이다.

글리프 7호의 뒤표지에는 최은영 작가의 간단한 자기소개가 있다. 글리프는 시험 문제를 낼 뿐만 아니라 최은영 작가에 대해, 최은영 작가를 사랑하는 이유를 실컷 풀어냈다. 그리고 뒤표지에는 작가가 생각하는 작가의 말이 있다. 순서가 어찌 됐든 잡지 속의 언어와 작가의 언어가 제대로 합쳐진다면 좋을 것이었다. 최은영 작가는 양귀자, 은희경 등 여성 작가의 글을 많이 읽었고, 그래서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가 자라는 동안 읽어온 다른 여자들의 글이 있었고, 그래서 쓰게 된 글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았다.


좋은 글을 읽는 동안에 본인이 더한 글을 쓸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알았을까. 우리는 그의 성공담을 알지만 작가 자신은 아마 오랫동안 불확실한 무엇들 속에 허덕였을 테다.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 몰라, 불안한 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무수한 날들이 지난 뒤에, 혹은 지나는 중에 써야만 하는 글들이 쌓여갔을 테다. 우리는 그런 시간들이 쌓인 글을 큰 대가 없이 읽는다.


아마 글리프는 그런 작가들의 시간에 조금 더 기민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만든 무엇일지도 모른다. 작품이란 것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두터운 인고의 시간이 필요한지 느끼는 사람들, 그런 마음으로 작품을 넘어선 인간에 집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최근 정세랑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최은영 작가와 비슷한 마음을 품었다. 정말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 나 역시 그런 내밀한 소설을 쓸 수 있으면 했다. 때마침 글리프 1호가 정세랑 작가인 것을 알게 됐다. 초대 작가로 정세랑 작가를 선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소설이 좋아도 작가를 찾아본 적은 없었는데, 처음으로 소설 작가의 이름을 유튜브에 쳐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의 얼굴을 꼭 보고 싶었다. 어떤 얼굴로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호흡으로 사는지 속속들이 알고 싶어졌다... 이런 게 덕질의 마음인가. 혹은 조금이라도 비슷해지고 싶은 걸까. 사실은 당신의 글이 너무 좋아서, 당신이 좋아졌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목소리를 내지 않을 때, 글리프가 대신 목소리를 내주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소설이나 에세이를 즐겨 보는 이유도, 감정의 언어를 대신 말해주는 목소리가 좋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종이잡지클럽>에 있는 동안은 한순간도 덥지 않았다. 겉과 속이 무척이나 개운해진 느낌이었다. 소설을 읽을 때면 이야기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이 조금 걸린다. 어쩌면 돌아오기가 어려워서 소설 속 인물들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어버릴 때도 있다. 비슷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글리프를 만든 것 같았다. 잡지를 읽는 동안은 현실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나를 허우적대게 할 작가는 세상 어디에나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잡지를 통해 전파되었다. 분주한 생각을 하는 동안 클럽은 여전히 서늘했다.


지면으로 확산되는 것들은 느리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우리에겐 좋은 게 좋은 이유를 차분히 담아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잡지를 통해 남의 시선으로 또 다른 남을 훔쳐보는 느낌을 가득 받았다. 언제고 빌릴 수 있는 그 시선들이 유익했다. 그렇게 모인 것들로 나의 시선을 구축하게 될 미래가 반갑기도 했다. 처음으로 주의 깊게 읽은 잡지가 글리프라서 다행이었으며, 처음으로 방문한 클럽이 <종이잡지클럽>이라 운이 좋았다.


난데없는 세상에서 난데없는 글을 쓰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신을 풀쩍 뛰어넘는 글을 쓰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담아내는 잡지들. 어떤 쪽이든 선명하게 아름답다. 이야기가 가진 힘을 믿기 힘들 때마다, 아름다운 것들을 번갈아 펼쳐볼 수 있어서 기쁘다.



작가의 이전글 정읍 혹은 부안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