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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Nov 01. 2023

요원한 꿈-

<글로 지은 집>을 읽고

(얼마 전, 공모전에 투고하기 위해 시작한 글이지만 끝내 완성하지 못해 브런치에 올립니다. 마감 시간을 잘못 알았지 뭐예요!)

글로 지은 집, 강인숙

집에서 나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본가에서 통학하는 대학생이 된 이후로 줄곧 그랬던 것 같다. 집의 안과 밖에서 모두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귀찮았기 때문이다. 집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도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푸욱- 쉬고 싶었을 뿐이다. 아직도 요원한 꿈이다.


이어령 작가에 대해 들어보았으나 그의 글은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아직 읽지 않은 것뿐이다. 그의 유작인 <마지막 수업>을 ‘언젠가 읽을 책 목록’에 넣어두었다. 목록은 날마다 쌓여가는데, 어쩐지 손에 집히는 책이 없다. 가장 최근에 재밌게 읽은 책은… 정세랑 작가의 것이었나. 아무튼 좋은 글을 읽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날들이 늘어가고 있다.


그런 부족함 때문인지 <글로 지은 집>이 강인숙 작가의 글이라는 것도, 강인숙 작가가 이어령 작가의 아내분이라는 것도, 이 책이 정말 ‘집’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읽기 시작했지만 정말 잘 골랐다고 생각했다. 한 부부가 글을 쓰며 쌓아 올린 집과 사람과 세계에 관한 내용이었으므로. 그들의 세계는 단단하지만 유약하고, 선하면서도 아팠다…


두 사람은 각자 대가족의 틈에서 자라 “서로 엉켜있기 때문에 막다른 골목이 없“는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 사람과 사랑으로 충만한 집에 사는 느낌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나에게 집은 의식주 중 ‘식‘에 더 가깝다. 끼니를 차려 먹는 모든 순간이 번거롭고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마주 보고 밥을 먹는 일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당장 마주한 끼니를 누가, 어떻게 차릴지가 관건이었다.


그렇다고 작가가 순탄한 생을 살아온 것만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일군 세계 속에서 픽픽 쓰러지면서도 올곧게 나아가는 강인함을 지녔다. 집을 집답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가족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어떤 사랑을 주어야 할지 아는 사람. 함께 미래를 바라볼 줄도 알고, 자신의 것을 희생해 나눌 줄도 아는 사람 말이다. 사람에게만 집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집에도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한편 책 속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묘지로 삼기 좋은 땅이, 집을 짓기도 좋은 땅이라는 것이다. 볕이 잘 들고 물이 잘 빠지는 땅은 사람을 잘 살게도 하고, 잘 죽게도 하는 것인가.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아가는 우리가 발을 붙이고 선 땅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집을 집으로 살아내고 있는지, 묘지 위에 서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비록 우리가 밟는 땅이 사실은 누군가의 천장이고, 새벽에는 까치발을 디뎌가며 조신히 걸어야 할 아파트라고 해도… 아무튼 조신한 몸과 마음으로 생각해 보자.


작가 부부의 집에는 다양한 예술인들이 많이 오갔다고 한다. 손님이 많은 집에는 복도 많다던데. 늘 손님으로 북적이던 집에 살아온 이어령 작가의 영향이 컸던 듯하다. 수십 년 전의 손님 대접이란 지금보다 훨씬 더 손이 많이 가는 일일 텐데, 그런 일을 미워하지도 않고 반가운 마음으로 있는 힘껏 대접했을 부부의 정성이 참 소중하다고 느낀다. 정성이란 게 미련하고 무색해진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이들이 지나온 집들은 각기 고유한 추억을 안고 있다. 때로는 공간이, 때로는 사람이 추억을 끌어안는다. 아름다운 공간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낸 작가의 몸에는, 온갖 삶과 죽음과 연민과 사랑이 가득 배어있는 것 같다. 서로를 아끼며 살아온 삶이 글에도 묻어난다. 사랑으로 충만한 자의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비록 무너지는 날들도 많았을 테지만 그럼에도 사랑이 이긴 삶 같다. 무지성으로 그 뒤만 졸졸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25년간 총 네 곳의 집에 살았다. 첫 번째 집은 엄마까지 넷이 살았던, 가장 온전하고 따스한 공간이었다. 18평의 오래된 아파트였지만 부족함이 별로 없었다. 두 번째 집은 처음으로 엄마가 떠난 직후 셋이 지낸, 가장 슬프고 불완전한 공간. 무엇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피하기만 했던 회피의 집이다. 그럼에도 직면할 수밖에 없던 수많은 슬픔과 아픔들이 있었다. 유일한 어른인 아빠가 가장 고통받았을 집. 고모네와 같은 아파트에 기대어 살았다.


세 번째 집도 역시 고모를 따라갔지만, 매일 밥을 같이 먹을 만큼 의존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우리 셋이 독립적으로 살 수 있게 된 첫 번째 집인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학창 시절을 보냈고… 아빠는 프리랜서로 독립했고… 밥도 알아서 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은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 아마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운이 좋게도 집값이 펄쩍 뛰기 전에 사게 된, 여러모로 다행인 공간이다. 내가 대학생이 되고 난 후, 다시 안정을 찾게 된 집이다. 설계사인 아빠가 부지런히 일하며 쌓아 올린 집이다.


한편 언젠가 내가 글로 지은 집을 아빠에게 선물할 수 있다면, 혹은 나라도 그런 집에 살 수 있다면 좋겠다. 그때는 내가 지혜 어린 눈으로 지난날들을 회고할지 모른다. 이제는 이어령 작가님 없이 강인숙 작가님 홀로 견뎌야 할 세상이, 우리의 것처럼 너무 두렵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면서 용기를 내실 수 있다면. 그러나 작가님의 곁에는 이미 좋은 동료가 많이 계시니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다. 이제껏 그러셨듯 다른 분들의 염려와 사랑을 통과하며 살아가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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