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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Nov 02. 2023

새 살이 차오르기 전에

올해의 중대사업 세 가지가 끝난 날, 다시 에세이를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브런치 공모 프로젝트가 끝나가는 주에 먹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유 없는 글을 다시 쓰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마감과 기획 없는 글을 쓰는 일이 근 한 달만이다. 마지막으로 쓴 에세이는 할머니집을 다녀온 후의 이야기다. (아무래도 그곳에서 진을 빼고 온 것 같다.)


연말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따뜻한 기후를 보내고 있다. 11월에 걸맞지 않은 온화한 햇빛을 통과하는 게 무척 이상하고… 동시에 여름이 확장되는 것 같아서 안심하고 있다. 날씨가 추워지고 나면 정말 올해가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오빠는 보드 타기 좋은 날씨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물가에 서핑을 하러 나가도 괜찮을 것 같다.


하루빨리. 오빠는 하루라도 빨리 추워지기를 바라고… 나는 하루라도 빨리 글에 대한 성과를 내고 싶다. 하루가 빨라진다고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런 염원으로 한 해를 전부 보낸 것 같다.) 한편 바라는 만큼 치열하게는 쓰지 못했다... 어떠한 성과라도 내지 못한다면, 조만간 무료하고 불안한 작가 지망생의 삶이 종료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취업 준비라는 걸 시작할 거고, 그건 다시금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일이다.


그런 미래가 아주 싫지는 않다. 한량처럼 글만 쓰며 살아보니 생각보다 몸에 맞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고정적인 루틴이 있는 게 좋은 것 같다. 게다가 수익화할 수 없는 글을 쓰는 건 꽤 가혹하다. 공모를 한번 내더라도 결과는 몇 달 후에 나올 것이고… 카페라도 가서 글을 쓰려면 커피값이 있어야 하니까! 작업실을 구하는 건 아직 실현되지 못할 원대한 꿈이니까!


아무튼 올해의 중대사업 세 가지는 스타벅스, 유럽 여행, 그리고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였다. 앞의 두 가지는 너무나 먼 과거처럼 느껴져서 올해의 일이라고도 믿기 힘들다… 그래도 아직은 같은 해니까, 사업 평가를 해보면 어떨까 싶다. 분주하게 달려온 시간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그리고 더 추워지기 전에 정리를 마쳐야 다음 스텝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언제나 다음 스텝이란 게 준비되어 있다.


먼저 스타벅스 근무. 기간은 2022년 7월부터 2023년 3월까지다. 약 8개월 간 근무했고, 그 기간 내내 감정이 격하게 요동쳤다. 나의 희노애락을 모두 담은… 그런 곳이다. 유럽 여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는데, 대학 생활과 병행하기 위해서는 스타벅스가 제격이었으므로 괜찮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카페 알바의 최대치를 경험해 본 것도 좋았다. 이제는 어떤 카페도 신속하고 유연하게 투입될 수 있다.


그리고 자금 마련이라는 주목적에 부합한 일이었다. 어떤 준비도 필요하지 않았고, 입사 과정도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월 100만 원 이상을 저축했고… 8개월 동안 최소 800만 원을 모은 것 같다. 유럽에서 쓴 돈이 1000만 원 초반대였으니까, 나머지를 원래 모아뒀던 돈으로 메운 것이다. 일하는 것도 어느 시점이 지나고 나니 지속할 만했다. 처음 3개월이 마의 구간이었던 것 같고, 그 이후로는 비교적 수월한 마음으로 일했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미래를 위해 보내는 시간.


다음은 유럽 여행. 2023년 3월부터 6월까지 총 86일간 13개국을 여행했고… 몹시 두려운 동시에 황홀한 날들을 보냈다. 새로운 것들을 보고, 오래된 관계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데 아주 많은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썼다. 여행하면서도 글을 쓰기 위해, 어쩌면 글을 쓰면서도 여행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아주 피곤하지는 않게, 그러나 너무 게으르지는 않을 만큼 쓴 것 같다.


처음으로 오랜 시간 집을 떠나 있었다. 그만큼 새로운 집이 생겼지만 무엇도 진짜 집은 될 수 없었고… 진짜인 것들로 돌아오기 위해 떠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진짜 집, 진짜 가족, 진짜 사랑, 진짜 교회… 그렇다고 여행에서 마주한 것들이 가짜였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기억보다 선명하고 아름다워서 두고두고 꺼내볼 거니까. 당시에는 힘들고 피곤하다고 느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미화돼서 그립기만 하다. (그리워할 것을 진작 예견했다.)


미래를 짐작하고도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는 게 나의 모순인 것 같다. 현재에 충실하다는 건 적당한 감사와 만족인 것 같고, 그런 마음을 길게 유지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충만한 순간이 길게 유지되는 사람들을 몇몇 보았다. 순수하게 부러워했다. 나의 체력과 한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았고… 긴 여행에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체력이라는 것도 알았다. 여기서 체력이란 몸과 마음의 체력 모두를 의미한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는 시간.


마지막은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매년 가을 열리는 이 축제는 쓰는 사람에게 주어진 최고의 기회다. (솜씨를 발휘할 시간이랄까…) 브런치북으로 엮은 어떠한 글이라도 공모에 보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총 7편의 작품을 제출했다.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기를 바라고 쓴 글들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내가 나를 열심히 발견해야 한다. 그걸 믿고 한 편이라도 더 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 먹어도 맛있는 글을 써야 한다.


이 공모에 제출하기 위해 작년부터 글을 차곡차곡 모았다(지난 프로젝트 낙방을 기점으로). 기획해서 글을 쓰는 일이 즐겁다는 걸 느꼈고… 동시에 진득한 마음 없이는 긴 연재를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단 호기롭게 시작했다가 뒷심이 부족해지는 날들이 많았다. 호흡이 너무 긴 연재는 몸에 해롭다는 것도… 아무튼 숨이 모자라질 무렵에 프로젝트가 끝난 것 같다. 앞선 경험들은 모두 글감이 되어 책으로 엮었다. 역시 허투루 얻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느끼면서.


그리고 감사하게도 <그린 에이프런 걸>과 <빵, 커피, 유럽>이 에디터픽 신작 브런치북에 선정되었다. 브런치 에디터들이 내 글을 후원, 혹은 지원해 준 것이다. 둘 중 뭐가 됐든 든든하고 벅차다. 생판 남에게 읽을 만한 글이란 걸 인정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글이란 건 혼자만의 일이 아니고… 기회란 건 뭐라도 준비하는 사람을 찾아오는 게 아닐까. 아무튼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쓸 맛 나게 해 주었다. 그래서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일단 펼쳐본 시간.


세 가지 중대사업이 끝난 지금은, 헛헛하면서도 홀가분하다. 털썩- 하고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고. 온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지만, 적당히는 했다는 총평. (비겁하다.) 어찌 됐든 쌓아 올린 것들이 반드시 결실을 이룰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당분간은 어떠한 기획도 들어가지 않은 글을 써보려고 한다. (소설도 다시 써보기로 하고…) 곧 다가올 오빠의 생일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뭘 하든 가장 중요한 건 여유와 믿음이다.


글쓰기 모임을 시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논의한 따끈따끈한 건인데, 하얗고 말랑하고 깊은 사람과 좋은 글을 나누게 될 것 같다. 일단은 쓰는 사람이 되기로 하고, 그것에만 충실한 시간을 보내면 좋겠다. 충실과 충만은 한 끗 차이고… 그 두 가지만 있으면 충분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11월 2일 자로 정리 마침.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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