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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Nov 29. 2023

잇츠 해프닝…

참 민망하다. 말을 번복하는 일은 언제나 부끄럽다. 어쩐지 내게는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 같다. 말을 많이 하기 때문일까, 변심을 자주 하기 때문일까… 변심과 회심. 회심은 교회에서 많이 쓰는 단어이다. 마음을 돌이켜 먹었다는 뜻인데,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상태의 마음을 의미한다. 주로 바울의 회심을 이야기할 때 많이 쓰인다. 변심은 그냥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언제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마음. 해까닥?


오늘 나의 변심. 머리를 잘랐다. 싹-둑! 단발로 자르고 소심하게 앞머리도 내었다. 풀뱅의 용기는 없었다. 지난 8개월 간 머리를 빗지 못했다. 히피펌을 풀리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제 처음으로 머리를 빗었는데… 히피펌이 형체도 없이 빗겨 나갔다. 이렇게 금방 사라질 머리인 줄 모르고 풀리지 않는 걸 신기해한 것이로구나. 어리석었다. 가지지 못한 것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착각했나.


역시 미용실에서 즉각 거부를 당하고야 말았다! 파마는 없는 머리엔 상한 자국만 가득했기 때문에… 누가 내 머리 불로 지졌냐. 씨컬은 불가능할 것 같았고 실제로도 불가능했다! 자의 반과 타의 반을 섞어 칼단발을 자행했다. 쑥닥 잘려나가는 머리칼을 보고 있으니 어딘가 모를 개운함이 밀려왔다. 수년간 기른 머리를 잘라내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초. 나의 시간이 이렇게 잘려 나가는구나.


지금은 머리를 자른 게 큰일 같지만, 사실 요즘 진짜 중요한 과업은 따로 있다. (너무 중요하니까 문단을 환기하도록 하자.)


레터를 발행하기로 한 일이다. 생각만 해도 장기가 뒤틀리는 느낌인데, 아직은 독자가 아는 사람밖에 없는데도 이런 마음이 드는 게 큰일이다. 대체 100명 이상의 얼굴 모를 독자를 마음에 품는 작가들은 얼마나 강한 심장을 가진 것인가. 거대한 독자‘들’에게 보일 글을 쓰는 사람은 어딘가 고장날 수밖에 없겠다. 누구는 폐쇄 공포, 누구는 공황 장애, 누구는 스트레스성 위염을 앓는 이유들이 있었다. 얼굴 없는 선의와 악의가 머릿속을 떠다니기 때문이다.


2주 전에 피부과에서 공황 비슷한 것을 겪은 일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어제 처음 피부과를 다녀온 것이다. 죽도록 아픈데 기계 소리도 크고… 때로는 바람까지 나오는 레이저를 상상하기만 해도 숨이 턱 막혔다. 오랫동안 숨을 참아야 치료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좁은 방에서 원장님의 레이저 공격을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상상에 시달리는 동시에 가격이 떠오르고… 그걸 생각하면 치료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게 파렴치한 일이었다.


역시나 디지게 아팠고, 아픈 것보다 공포스러웠고, 숨이 쉬어지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원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숨이 답답해지면 손을 들기로 했다. 눈을 감은 동안 내 얼굴에 무슨 짓을 할지 예상할 수 없어서 힘든 것 같았다. 그리고 얼굴을 마구 쏘아대는 레이저의 소리가 너무나도 컸다! 어제가 9번째 치료였다. 7번째까지는 아프기만 했는데, 8번째부터 공포감이 동반되는 이유를 모르겠다. 정신이라는 건 이유를 알 수 없이 조각나기도 하고, 덧붙여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두렵다는 걸 느낀다.


같은 에세이를 쓰고,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크게 좌우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도 어쩐지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레터를 발행하겠다는 야심한 계획을 품고 있기 때문일까, 혹은 무엇도 없는 상태로 너무 오랫동안 글만 쓴 것인가. 12월이 가까울수록 어떠한 위기감 같은 것들이 든다. 쫓기는 마음으로 레터를 시작한 것 같기도 하다. 12월을 불태우고 싶었던 것일 뿐인데, 실은 불타는 것이 내 정신이었나.


요즘 읽고 있는 글은 유지혜 작가님의 “뉴욕 통신”이다. 역시 온라인 레터이고, 그가 뉴욕에서 겪은 일과 사람, 사랑, 마음에 관한 에세이다. 되게 솔직하면서도 무척이나 긴 글이다. 물론 쓰는 자에 의해 각색된 솔직함이겠지만, 읽는 자의 입장에서는 그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열 다섯 편의 글을 배송받았는데, 읽는 내내 그가 정말 집요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레터 초대장에 적힌 대로였다.


최종화에서 그가 독자들을 여러분이라고 부를 때, 지금까지 나는 그 ‘여러분’에 속해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껏 그의 충분한 독자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다른 평범한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지, 그게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쓰는 자의 편에서 보았기 때문일까. 어떻게 이런 문장을 쓰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했지만, 그래서 내가 무엇을 받았고 느꼈는지는 뒷전이었다. 가장 교만한 독자가 아니었을까.


쓰고 싶은 글을 오랫 동안 쓰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공신력을 얻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전히 모르는 사람들, 얼굴을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법한 사람들에게서 신뢰를 얻어야 하는 일이다. 나도 그런 공신력을 얻어가는 과정에 있나. 초이레터를 광고하면서 느낀 건, 내 글을 읽도록 설득하는 게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이미 공신력을 얻어 충분한 독자를 꾸린 작가들의 자태를 바라만 본다. 조금은 허무하고, 부럽고, 질투도 나고, 궁금도 하다. 대체 어떻게 하셨어요… 그저 머리털 빠지도록 글만 쓰신 건가요…


오말초가 빌려온 김겨울의 문장을 빌려와본다. “마감이 없다고 글을 쓸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정말 자신이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 잘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작가는 오로지 쓰는 것으로 증명되기 때문에요. 누군가가 꼰대에 옛날 사람이라고 말해도, 저는 읽지 않는 사람이 좋은 글을 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또한 오로지 머리 빠지게 쓰는 행위를 하는 동안만 그는 작가라고 믿습니다. 사람은 호칭이 아닌 행위로 증명되므로 바람과 행위를 일치시키는 하루, 그런 시간을 허락받는 하루를 보내시길.”


바로 오늘 머리털이 잘리긴 했지만, 머리털이 빠질 만큼 글을 써본 적은 없지 않나. 그렇게나 작가인 사람들의 하루를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나는 하루에 한 시간만 작가인 셈이다. 읽는 것까지도 작가의 일이라면 조금 더 되겠지만. 지금 내 시야에는 말초에게 선물받은 유지혜 작가의 책이 놓여 있다. 그의 글을 화면으로 보는 것과 지면으로 보는 것은 무척 다르지만 어느 쪽에서든 다채롭게 써내려가는 그의 멋짐을 생각한다. 과연 작가님의 머리털은 안녕하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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