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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Jan 30. 2024

24시 감자탕집의 애환

남자친구에게 네 가지 후보를 줬다.


1. 수제비 2. 감자탕 3. 삼계탕 4. 국밥


이 후보군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내가 미친 한국인이라는 사실이다. 탕과 찜과 뚝배기에 죽고 사는 크레이지 코리안. 격한 근력 운동을 했음에도 프로틴을 챙겨 먹지 않은 남자친구를 위해 오늘 점심은 감자탕으로 골랐다. 정확히는 뼈다귀 해장국이다. 두근두근.


우리 동네에는 단 한 곳의 24시 감자탕집이 있다. 감자탕이나 해장국을 먹으려면 별 고민 없이 그곳을 향한다. 몇 시에 가도 눈치 보지 않는 곳. 온갖 인간 군상들이 가득한 모두의 단골 식당, 감자탕의 기쁨과 슬픔.


직장인들이 떠나고 난 오후 두 시, 가게는 매우 한산하다. 24시 가게답게 널찍하고 어쩐지 황량한 느낌도 든다. 구석에서 종일 소주를 까먹어도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오후 두 시에 식사하는 사람들은 어떤가. 어쩐지 못 미덥다. 보통의 근무 시간을 벗어난 사람들. 나는 수목금 근무자이고, 남자친구는 오후 4시 출근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명백한 백수로 생각할 것이다.


우리에게 뜨끈한 뼈해장국과 솥밥을 가득 내어준 뒤, 식당 직원들 점심시간이 시작되었다. 바로 우리 뒤에서 상추를 챙겼냐느니, 숟가락도 안 놨냐느니, 하는 질타와 투정들이 이어진다. 서로 되게 친하신가 보다... 혹은 되게 안 친하신가 보다... 생각하며 오빠와 살짝 웃는다. 우리의 손도 바쁘기 때문이다. 뼈다귀를 발라야 하니까. 나는 살을 대충 발라 먹는 편이고, 오빠는 하나하나 야무지게 뜯어먹는다. 감자탕을 먹을 때마다 오빠에게 타박을 당하지만 굴하지 않고 대충 발라 먹는다. 고상한 척하는 건 우리 집 유전이니까.


각자 살을 바르는 데 집중하다 보니 다른 테이블의 소리가 흘러 들어온다.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는 쾌남 아저씨가 있었다. 요즘 경기가 안 좋다고, 밖에 나와서 밥을 먹고 있다고. 두 문장이 크게 이어지지는 않지만 뼈해장국 한 그릇 정도는 쓰린 속을 달래는 데도 제격이니까. 어쩐지 표면만으로 이루어진 대화를 듣는다. 비록 감자탕집에서 스피커폰으로 통화하는 분이었지만 상대에게는 예의를 차리는 목소리다. 이윽고 다음 전화. 이번엔 분명 손아랫사람인 듯하다. 무심한 듯 덤덤한 말투로 청주에서 밥 먹는 중이라고 말한다. 이번엔 경기가 나쁘다느니 하는 상황 설명은 없다. 말을 안 해도 알고 있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사람일 테다.


요즘 경기가 안 좋다는 말에 우리도 진심으로 공감한다. 우리 아빠도 어쩐지 그 공격을 직격타로 맞은 것 같아서 그렇다. 프리랜서 설계사인 아빠의 삶은 얼마나 고단할지 잠시 생각한다. 감자탕은 대충 발라 먹으라던 아빠. 배부르면 그만 먹으라던 아빠. 딸한테 힘들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표정에 다 드러나는 아빠. 사무실이 적적하다고 맨날 보는 드라마 소리를 틀어놓는 아빠. 생각해 보니 그가 환한 얼굴로 용돈을 주던 게 까마득하다. 이제는 내가 용돈을 주는 쪽이 더 빠를 것도 같다.


남자친구와 고기를 다 발라 놓고 숟가락으로 시원하게 퍼먹을 즈음. 두 아저씨가 들어온다. 그들의 표정이 요즘 불경기라던 아저씨의 것과 같다. 불이 켜지지 않은 구석을 파고들어 자리를 잡자, 밥을 먹던 식당 아주머니가 오셔서 이 자리는 아직 사용하지 않는다고 안내한다. 아저씨들은 앞으로 한참 술을 먹을 거라고 말하고, 몇 번의 대화가 오간 끝에 결국 '그까이 거 아무 데나 앉으면 어떠냐'고 덥석 화를 내고 만다. 아주머니는 한숨을 쉬며 돌아가고, 우리는 여전히 국물을 퍼먹지만 비슷한 온도로 속이 끓는다.


뒤편에선 한 여자가 밥을 먹으며 오지 않는 상대를 기다린다. '왜 안 와~' 같은 내용의 통화가 한 번, 혼잣말이 한 번 이어진다. 나와 오빠는 이 모든 사람들의 틈에서 조용히 한 뚝배기를 해치웠다. 물론 양 적어 커플이라 겨우 반그릇 먹은 게 전부지만... 배가 터질 것 같다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술을 먹을 거라던 아저씨들이 감자탕을 보글보글 끓여가며 술을 홀짝대는 모습을 상상한다. 어쩐지 애처롭고 짭짤하다. 


감자탕을 다 먹고 스타벅스에 갔다가 머리를 자르고 도서관에 와서 이 글을 쓰는 지금, 도 그 아저씨들은 술을 홀짝이고 있을 테고. 직원분들은 식사를 진즉에 마치고 다음 과업을 이어가고 있을 테다. 잠시도 불이 꺼지지 않는 감자탕집에서 온갖 들깨와 우거지와 대파와 고기가 사람들의 손을 거쳐갈 것이다. 


24시간 감자탕집에는 애환이 있다. 거기엔 배고픈 사람들, 서글픈 사람들, 무료한 사람들, 피곤한 사람들, 취한 사람들, 취할 사람들이 있고 언제나 기본 이상으로 맛있는 감자탕이 보글보글 끓는 중이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사람들. 마르지 않는, 마를 일 없는 감자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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