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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Jun 12. 2022

글 쓰기 싫은 날

며칠 동안 시험 기간을 핑계로 글을 멀리 했다. 그야말로 죄책감과 부담감과 짜증이 완벽한 삼박자를 이루었다. 매일매일 글을 쓴다는 건, 나를 무지하게 괴롭혀서 습관으로 만들어버리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것 같다. 글쓰기의 습관을 가지신 분들 정말 존경합니다. 실은 그동안 야심차게 미래 계획도 좀 세웠다. 아마 이 소망의 시발점은 책 <연금술사>를 읽었던 날일 거다. 예전부터 해외여행이나 교환학생을 꼭 가보고 싶었다. 학생이라는 이유로, 청주에 있는 학교에서 미국에 있는 학교로 보내준다는데, 안 갈 이유가 있을까. 졸업이 조금 늦춰지더라도 꼭 가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렇게 호기로웠던 1학년은 유학에 필요하다는 토플 준비를 시작했지만, 영어로 듣는 것도 어려운 한국인이 영어로 읽고, 말하고, 쓰기까지 해야한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이래서 다들 토익을 하는 거였구나. 보편과 대중성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토익이 그나마 쉬운 지경이라니, 교환학생이 한 걸음 멀어졌다. 나는 친구 코지와 함께 토플을 때려치우고 학교를 좀 낮춰서 미국의 시골이라는 오클라호마를 목표를 잡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도 이 나라 지방에 사는 마당에, 미국 지방에 사는 것 쯤이야. 그렇게 적절한 타협을 거친 우리는, 정확히 2학년이 시작되자마자 코로나를 맞이했다.


그게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몰랐지만 적어도 내 2,3학년이 통째로 날아갈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오히려 좋았다. 1학년 때 술모임에 술파티에, 술 먹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진절머리가 났는데, 잠시 디톡스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우리 집에는 술 먹겠다고 나를 약자로 만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내가 그 되도 않는 자리에 끼겠다고 나를 약자로 만들지도 않았다. 우리집은 선물 받은 술도 1년 동안 발효시키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만 살았으므로, 아빠가 일생 술을 먹지 않는다는 점이 나를 쉬게 했다. 여하튼 코로나 국면을 맞은 2학년은 그저 집, 집앞 카페, 친구 집, 친구 집앞 카페 정도만 오가며 이너 피스를 찾기로 했다.


이제는 코로나가 정말 끝이 보이는 구나, 싶다. 아마도 내가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 미국 학교가, 우리 학교와 나를 교환하고 싶어하지는 않을 듯했고. 해외 여행도 모아둔 돈이 있는 사람이 가는 일이라며 단념했었다. 근데 그 연금술사 책에서 그랬다. 내가 무언가를 못하게 막는 건 나 자신밖에 없다고. 진짜 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는 내가 해외로 뜨고자 하면 뜰 수 있다는 거였다. 그게 몇 달이든, 몇 년이든 어쨌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술사가 말해줬다.


그렇다고 몇 년씩 해외에서 살겠다고 한다면, 그건 거기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얘긴데 나는 그럴 마음은 없었다. 흔히들 말하는 워킹 홀리데이는 타지에서 타지의 언어를 사용하며 타지의 사람들을 서비스 마인드로 상대해야 하는 건데. 나는 우리 동네에서 알바하는 것도 한 달만 하면 지치는 사람이라 안 될 거였다. 그냥 원래 하던대로 집 앞에서 커피 냄새 맡으면서 돈 좀 벌고, 가능한 만큼 해외에서 살아보기로 했다. 이제 막학기를 앞둔 내가, 졸업을 하면 출판 스쿨을 가거나 취뽀를 바로 해버리겠다는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꿈을 잠시 버려두고, 그냥 원하는 걸 좀 해보겠다는 마음을 먹은 게 기적 같았다.


사실 난, 인생에서 지금이 아니면 없을 기회를 누리겠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좀 쉬어야겠다. 평생 성공을 위해, 취업을 위해, 그렇게 얻을 안정을 위해 달려왔던 나인데. 어린이집부터 유치원에, 초중고를 다 나왔더니 재수를 해야 했고, 그 시간을 버텨 대학을 왔더니 바로 취업길이 열렸다. 1년도 멈춘 적이 없다는 게 좀 가련했다. 아무 데도 속하지 않으면서 아무 이름도 갖지 않고 온전히 나만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으려나. 물론 또 올 거다. 아마 내가 낳을 자식을 다 독립시킬 쯤…. 나는 그냥 많은 걸 보고 싶을 뿐이다. 최근 내 인생 영화로 등극한 <맘마미아!>의 도나처럼, 내가 속하지 않은 세상이 궁금한 거다. 내게 있는 모든 가능성을 활짝 열어두고 싶다.


무엇보다 온전히 글만 쓰는 시간을 가져볼 마음이다. 나는 지금까지 고등학생으로서, 그리고 대학생으로서 짬을 내서 글을 써본 게 다였으니까. 글 쓰는 삶을 주역으로 둔 적은 없기 때문이다. 사실 매일 글쓰는 습관을 들이기 위함이기도 하다. 이 집에서 못 들이면 딴 집에서도 들이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내가 저녁 때마다 식탁이나 부엌으로 가지 않아도 되는 집이라면, 건조기에서 나온 빨래들이 자꾸 나를 쳐다보지 않는 집이라면 한 자라도 더 써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나만 챙겨도 되는 그런 집에 살아보고 싶은 건 욕심은 아닐 거다. 그리고 아빠에게 나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러니 아빠도 아빠의 자립 능력을 키우라는 의미에서. 물론 이건 경제적인 건 절대 아니고 의식적인 거, 돌봄 같은 거다.


그러니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자리를 물리고서라도 새로운 영역에 진입하고 싶다는 용기를 내본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그리 길지 않은 여행일 테지만 나는 나에게 집중하고, 나를 더 깊숙이 사랑하고 말 거다. 비록 밤산책을 할 때도 무서워서 뒷길은 쳐다도 못 보는 나지만, 에펠탑 앞에 돗자리는 한번 깔아봐야 하지 않나. 디즈니랜드는 안 가더라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 사람들 틈에서 열심히 타자를 쳐볼 거다. 글 쓰기 싫은 날을 생각하다가, 결국은 앞으로 어떻게 더 글을 써제낄지 공표하는 글을 써버렸다. 이게 내 숙명일 테지, 뭐. 아빠가 미워서 글을 쓴다지만 결국은 더 사랑하고 싶어서 쓰는 것처럼.


글이 자꾸만 나를 솔직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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