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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Oct 26. 2022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누군가의 잘 써진 글을 읽다보면 내 글을 미친 듯이 쓰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의 삶이 이상적인 사람에 한해서다. 지금까지는 그게 이슬아 작가였다. 어째서인지 그를 처음 알게 된 이후로 그의 글만 제대로 본 것 같다. 아마도 티비 프로그램에서 그를 처음 본 것 같은데, 그 삶이 너무나 대단하게 닮고 싶어서 그의 글도 좋을 것이라 단박에 확신해버렸다. 그는 당시 나무로 된 복층집에 살면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요가 수련을 하고, 채식을 하며, 글을 썼다. 혹은 글을 가르치거나. 그 잔잔하고 강력한 일상이 나를 흔들어놓았다.


그래서 그의 글을 바로 구독하고 돈을 지불했다. 결과는 역시나, 내가 쓴 돈 중에 가장 후회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메일 연재를 엮은 수필집은, 글을 쓰고 싶은데 쓰기 싫을 때마다 열어보는 일종의 준비 행위 같은 게 되었다. 그 두꺼운 수필집은 보고만 있어도 글이 나오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어서 책을 샀다. 제목은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세상의 수많은 글쓰는 자들이 글쓰기에 대한 글쓰기를 한 글의 모음이었다.


실은 이런 책을 살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글에 대한 지루한 강연을 할까봐 걱정하는 마음으로 샀다. 그리고 첫 장을 펼치자마자 이건 무조건 내 꺼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소공녀’와 ‘페르소나’를 만든 전고운 작가가 말했다. “이런 나의 생각이 문제다. 쉬운 것은 인정하지 않는 생각. 어려운 것만 진짜라고 여기는 생각. 결핍과 고통에서 빚어진 게 아닌 글들은 가치 없다고 여기는 생각.” 진짜 미쳤나보다. 혹시 나세요?


또 이렇게 말했다. “기존에 나를 동기화하던 가치관이 효력이 다하였다면 폐기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고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거라면 과감히 모든 것을 관두고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내가 남들보다는 조금은 더 비범한 줄 착각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난 항상 내 글에서 평범보다는 비범해지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실은 이미 내게 비범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 단정지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 대가를 치르고 싶지는 않은데.


지구 어딘가에서 나만큼 혹은 나보다 생각이 많은 누군가가, 자신에 대한 깊은 생각과 세상에 대한 얕은 생각으로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다가 결국은 쓰기로 다짐해내는 이야기는 언제나 반갑다. 실은 이렇게 책을 읽고 빨리 생각해서 천천히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오랜만인 이유가 있다. 지금까지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팔고 왔기 때문. 주 5일씩 일하면서 주 4일씩 학교를 가는 살인적인 스케줄에 나를 던져놨기 때문이다. (평일만이 아니라 주말까지 겹쳐서)


사람이 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며 사는 것만큼 피로한 게 없다. 사실 나는 한 순간도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본 적은 없지만, 내가 말하는 생각이란 깊은 사유. 글로 옮겨 쓸 만한 생각. 그것들이 내게는 없었다. 사람이 여유가 없으니 온갖 화가 다 치밀어오른다. 인류애를 상실하고 불특정 다수에게도 덥석덥석 분노를 던진다. 속으로만.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앞에서도 반 수면 상태로 헤롱거렸다. 그들은 나의 피곤함을 이해해주었지만 누군가의 피곤을 이해하는 것도 피로한 일이다.


지금은 학교 시험 기간과 겹쳐 연차 이틀, 휴무 이틀을 붙여 4일을 쉬게 된 기적 같은 하루들이다. 처음 이 휴가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드라마 같지만 진짜 그랬다. 3개월 간 수습 바리스타였는데. 쉼이란 건 먼 얘기 같았는데, 이렇게 대놓고 쉬는 날이 생겨버리다니. 더는 버티기 어렵겠다고 생각할 때마다 이런 휴식을 떠올렸다. 내가 스타벅스에서 보는 사람들과 같은 그런 쉼. 책 한 권 들고 카페에 와서 찬찬히 들여다보는 일. 남자친구 혹은 친구와 카페에 와서 떠오르는 말들을 주저리 주저리 내뱉는 일. 그런 무용한 수다.


그런 일상의 회복이 내게는 가장 시급했다. 이렇게 멈추고 보니 멈출 일이 있어야만 멈추는 내가 부끄럽기도 하다. 어제는 아는 오빠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을 다녀와야 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나의 삶을 생각해본다. 또는 누군가의 죽음 앞에 놓인 나의 삶을. 죽음을 바라볼 때만큼 삶이 단순해질 때가 없다. ‘메멘토 모리’라는 말을 한창 외우고 다닐 때가 있었다. 삶이 나를 고단하게 할 때마다, 또는 무지하게 기쁜 순간 앞에서도 나의 죽음을 기억하자. 나는 죽음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존재일 테니까.


그리고 부친상을 겪은 그 오빠와 지난주에 이런 말을 했다. 그는 차가 있고 근처에 산다는 이유로 나의 새벽 기도 메이트였는데, 같이 기도를 갈 때마다 점점 전우애를 갖게 됐다. 한창 불 붙어 새벽 기도를 가다가 말게 된 지금, 기도를 소홀히 하는 스스로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쩌면 기도를 하지 않아서 생긴 것 같은 특수한 문제들이 있었다. 이전에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던 것들이 자꾸만 발목을 잡았다. 나의 경솔한 언행이라던가, 누군가의 경솔한 언행이라던가. 스타벅스에서는 그런 게 큰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오빠는 별일 없었냐고. 나같은 생각 안해봤냐고. 그는 그런 건 없었다고 말했다. 그냥 아침을 깨우고 첫 시간을 기도로 드리는 게 좋았다고 말했다. 그거면 됐는데. 지금 그에게는 감당하기 가장 어려운, 어쩌면 앞으로의 인생을 완전히 뒤집을 만한 희대의 사건을 마주하게 되었다. 나와 그런 이야기를 한 이후로… 신이 보시기에 우리의 대화가 얼마나 순수하고 무지해보였을까. 그러니 나도 누군가의 죽음 앞에 놓인 나의 삶을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의 행보로는 후회밖에 남지 않을 거였다.


글에 대해 생각하다가 쉼에 대해 생각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나의 삶으로 돌아온다. 이런 수많은 생각의 원소들이 가끔은 유약한 나를 괴롭게 하고 가끔은 단순한 나를 기쁘게 한다. 그런 찰나의 행복이 내 기억을 좌우할 텐데. 순간순간 누리는 기쁨과 웃음이 더 많이 필요한 삶이다. 그래서 요즘은 농담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정말 재미도 없는 농담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쩌면 그들은 농담을 한다는 행위 자체에서 여유를 만끽할 지도 모르겠다. 험하고 높은 내리막길에서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내려오는 느낌으로다가… 그런 마음으로 죽음을 기억하며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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