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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Jan 18. 2023

보드 타러 왔서요

보드 광인인 남친을 따라 스키장을 향한다. 가는 길에도 스키장이 아니라 -드장이라고 불러야 한다며, 보드의 간지남에 대해 잔뜩 강조한. 출발부터 그는 듀근듀근 설렌다며 평소와 같이 노래를 불렀다. 그게  귀엽고 소중해서 보드와 친하지 않은 나까지 조금 설레게 됐다. 설레하는 누군가를 보면서 같이 설레하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사실 나는 보드 광인에도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싫어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래서 오빠가 보드를 타러 가자고 했을 때도 겁을 냈다. 무수히 많이 넘어지고 무수히 많은 멍이  것이다. 눈에서 넘어지면  아플  같지만, 땅바닥에 넘어지는 거랑 똑같다. 눈은 생각보다 폭신하지 않다. 보드를 타면 앞으로도 넘어져서 무릎이 깨지고, 뒤로도 넘어져서 엉덩이가 깨진다. 어느 쪽이든 된통 깨져봐야 타는 폼이라도   있다.


오빠가 빌려준 보드복은 나를 아주 둔하게 만들었다. 점프슈트처럼 지퍼만 올리면 되는 원피스인데, 한번 입으면 웬만해서는 벗고 싶지 않은 녀석이다. 편해서라기보다는 감당하기 힘들어서랄까. 엉덩이와 무릎 보호대까지 야무지게 빌려가면서, 핑크색 보드복을 입은 여자들을 봤다. 왠지 너무 부러워졌다.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정색으로 도배된 곰탱이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빠에게 다음부터는 나도 핑크색을 입고싶다고 소소한 투정을 부렸다. 오빠는 지금이라도 핑크색 옷을 입으러 가자고 했지만, 나는  옷을 다시 벗을 만큼 간절하진 않았다. 그렇게 불필요한 부러움을 느끼며 스키장에 입성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보드복을 입고 스키장을 활보했다. 푸짐한 옷과 단단한 신발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어쩐지 둔하고 귀여워보였다. 평소라면 절대 걷지 않을 만한 걸음걸이가, 이곳에서는 마음껏 용인되고 있었다.


우리는 자그마치 6시간의 리프트권을 끊었는데, 처음 한시간을 타자마자  시간이 무자비하게 느껴졌다. 1시간이면  두세번 정도 슬로프를   있는데,    정도 타니까 궁뎅이가 너무 아프고 추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이 정말 강하지 못하다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오빠랑 새우튀김우동을 하나 시켜서 나눠먹었다. 예전 같았으면 오빠는 계속 보드를 타고 싶어하고 나는 미안하지만 쉬고 싶어하는 애매한 광경이 연출됐을 텐데, 많은 시간이 지날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맞춰지고 있었나보다.


보드를 타기 위해 리프트를 오르면 낯선 이들과 엉덩이를 붙이고 아 그들의 이야기를 듣 된다. 사실 우리는 훔쳐듣기보다는 들려주는 쪽에 가까웠다. 대체로 슬로프에 엎어져 있거나, 엎어질  같은 사람들을 보며 나와 닮았다고 얘기하는 편이다. 보드나 스키를 타려면 정말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넘어진 김에 아예 대자로 뻗어서 쉬는 사람들도 많다. 나 역시 넘어지면 잠시 앉아서 쉬었다 간다. 특히 상급처럼 슬로프가 긴 경우에는 사람들이 언덕마다 시체처럼 널브러져있는 걸 자주 목격한다.


그리고 이번에는  울지 말자고 다짐한다(). 지금까지 보드를 타러  때마다 꼭 울거나 싸우거나 섭섭해했기 때문이다. 그치만 이번에도 역시나 한번 울고 말았다! 평소 못하던 자세를 해보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다가, 엉덩이를 지대로 박았기 때문이다. 꼬리뼈도 아니고 정말 살이 가득한 곳으로 떨어졌는데도, 말이 안 나올 만큼 얼얼하게 아팠다. 부딪힘이라는  이런 거였지. 서러워서 눈물이 질질 나는 아픔이었지. 촉각이란  이렇게 살벌하고 처절하게 다가오는 감각이라는 걸 실감한다


열심히 눈을 타고 내려오다가(그야말로 산타가  느낌), 갑자기 겁을 잔뜩 먹게 되는 때가 있다.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눈을 열심히 바라보다가 넘어질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드는 순간이다. 넘어졌던 고통의 감각이 선명하기 때문일 것이다.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치려면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멈추지 않고 부단히 내려가는  도망치는 길이다. 다른 방법도 다른 사람도 없다. 오빠가 곁에 있어도 온전히 혼자만의 싸움이다.


그래도 민트색 점퍼에 자주색 비니를 쓰고 바삐 내려가는 남자친구를 보면  도움이 된다. 한번씩 추고 내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출발하는 그를 보면서 숨을 잔뜩 쉬고 한번 내려가보는 것이다. 눈의 여운을 잔뜩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타러  날을 생각해본다.  많은 겨울날이 지나가기 전에 돌아와야  것이다. 그 때는 새로운 자세를 시도할 만큼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라면서. 먼 일 같아도 금방 돌아와서 용기를 내야할 것을 안다. 그 땐 조용히 핑크색 보드복을 빌려야지.


그리고 집에 오는 동안 비와이의 노래를 들으면서 깊은 신념에 대해 이야기한다. 믿음과 비길 것은 없다고 생각하면서, 영화 미나리를 보고 어쩐지 조금은 찜찜한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다음날 아침 7시에 스타벅스를 열어야 한다. 알이 적당히 배겨야  텐데. 다시 커피를 팔던 춥지 않은 그곳으로 돌아가면 오늘의 눈밭이 잔뜩 생각날 것이다.  속에서 잔뜩 파묻혀 덜덜 떨었어, 그래도 마냥 웃겼던 오늘을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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