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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Jan 20. 2023

인생은 딸기잼 없는 스콘 같아서

아이폰 유저라면 페이스 타임을 즐겨 이용할 것이다. 딜레이도 별로 없고, 전화만큼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꽉 차게 얼굴을 볼 수 있다. 나는 페이스 타임 해비 유저다. 비록 요즘은 사는 게 바빠서 많이 못 썼지만.


나는 외롭거나 심심하거나 소통이 필요할 때 전화보다 페이스 타임을 주로 건다. 페이스 타임을 선호하는 멤버들이 있기 때문에, 고정된 몇 명에게 주로 건다. 아무에게나 대뜸 영상 통화를 거는 것도 실례니까! 그래서 내게는 탑 3 정도가 있다. m과 j와 w이다. 우리의 페이스 타임 역사는 꽤나 진득하게 흘러왔다.



m과는 정말 아무 이유 없이 얼굴을 마주본다. 집에서 티비를 보다가, 밥을 먹다가, 편의점을 가다가, 운전을 하다가 등등. 솔직히 똥 싸는 거 빼고는 다 보여줬을 듯. 씻을 때 어깨선까지 보여준 적도 있다. 마치 남자친구와 밤새 전화를 하는 것처럼 우리는 그냥 페이스 타임을 켜놓고 일상을 공유했다. 특히 시험 기간에는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의식이 집중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철저한 보여주기 식), 서로의 민낯을 앞에 두고 공부를 했다.


우리는 고등학교 동창이고, 나는 대학 입학 전 재수를 했으며, m은 휴학 후 공시 공부를 했다. 집이나 독서실에 틀어박혀 공부를 한다는 게 얼마나 무거운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었으므로 서로의 얼굴을 옆에 두고 있는 게 그 무게를 조금 덜어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꼭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지 않더라도 우리는 많은 일을 온라인 상으로 공유했다.


지금 하나 생각나는 게 있다면 남자친구와 싸워서 울다가 m과 페이스 타임을 한 것이었다. 울고 있는 나를 두고 m은 적당한 위로와 함께 삼계탕을 먹었고, 나는 다 울고 난 후에 햄버거를 먹었다. 그 때까지 서로의 얼굴을 앞에 두고 있는 게 심리적인 위로가 되었으므로 나는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었다. 대뜸 전화를 걸어도 일하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얼굴을 보여주는 m 덕분에 많은 날들이 외롭지 않았다.


얘는 아빠랑 차에 있다가도 페이스 타임을 받았다. 페이스 타임은 기본적으로 스피커 폰이기 때문에 나는 옆에 계신 걔네 아빠가 들을 걸 생각하면서, 왜 전화를 받았냐고 타박하기도 했다. 그만큼 m은 아무 때나 어디서나 전화를 받아주었다. 얘네 사촌동생이랑도 페이스 타임으로 얼굴 보고 인스타 친구까지 됐으니 말 다 했다.



j는 나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재수 메이트였다. 같은 곳에서 공부를 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공부를 끝내고 온 많은 밤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인생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에 대해서, 스무 살의 우리가 왜 재수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놀고 있는 친구들이 부럽지만 우리도 곧 놀게 될 것이라는 희망 같은 것들을 두서 없이 늘어놓았다. 자꾸만 철학적으로 인생을 논하게 되었으므로, 재수하지 않은 자와는 인생을 논할 수 없다는 우리만의 비합리적인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j와 m과 나는 같은 고등학교 모임에 속해있지만, 걔네와 각각 페이스타임을 할 때는 아주 다른 분위기로 흘러갔다. j와 페이스 타임을 할 때는 주로 입을 털었다. 얘와는 각자 두고 할 일을 한 것보다 그냥 온종일 다물고 있던 입을 봉인해제하거나, 무언가 좋은 일이나 힘든 일이 있을 때, 정말 심심해서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 전화를 걸어서 입을 마구 놀렸다.


j는 집에서도 깔끔하고, 예쁘고, 정돈되어 있는 편이다. 반면 나는 집에서 가장 편하게, 가장 쉽게, 가장 대충 존재한다. 그냥 존재만 한다. 그리고 얘는 자취를 하지만 나는 본가에 산다. 그러니, 우리의 배경은 다를 수밖에 없다. 얘는 나와 페이스타임을 할 때도 머리를 만지고 꽤 괜찮은 각도를 찾는다. 어쩌면 그게 j의 방식이었다. 어디서든 꽤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


얘는 살인적인 스케줄에서도 쉽게 울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어떻게든 긍정적인 면을 본다. 고통 속의 유머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다. 웃음 장벽이 정말 낮아서 내가 시덥잖은 말을 해도 픽 하고 웃고, 힘들다는 얘기를 하면서도 그래도 괜찮다며 다시 웃고, 대신 나의 힘듦에 대해서 걱정해주는 식이다. 내 주변에서 나와 잘 맞는 유일한 estj라고 할 수 있겠다. enfj인 나와 잘 맞기 힘든 유형임에도 우리의 시간이 서로를 맞춰 주었다.



마지막은 w. 얘도 고등학교 동창이고, 재수 메이트다. j와 w는 같은 독학재수 학원에서 공부를 했다. 나는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같은 시간을 소유했고, 00년생들과 함께 수능을 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00년생들과 함께 입시를 한다는 게 미친 경쟁률이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그 때는 그런 걸 가릴 만큼 우리가 여유롭지 못했다. 삼수를 할 수는 없어서 재수로 끝내야 했다. w는 미술을 하기 때문에 입시 미술 학원도 겸해서 다녔다. 걔는 아마 두 배로 힘들었을 거다. 공부도 하고 예술도 해야 했으니까.


w은 이제 사회 초년생이 되었다. 졸업 예정자로 디자인 관련 회사에 입사해서 지금까지 6개월 정도 일하고 있는 아기 회사원이다. 어제는 오랜만에 페이스 타임으로 얘기를 했는데, 둘다 일하고 와서 피곤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옆으로 누워서 페이스 타임을 하면 얼굴이 원래보다 두 배는 길어 보인다. 모두가 패트와 매트처럼 보인다. 어제의 패트와 매트는 일과 사회에 지친 채로 입을 털었다.


나는 사실 스타벅스고, 카페고, 알바니까 걔만큼 피로하지는 않았을 거다. w는 요즘 너무 바빠서 새벽 4시까지 일하기도 했단다. 대학교에서 과제하다가 새벽 4시에 자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미대 과제는 어찌 됐든 개인의 일이고, 자기 주도 학습이니만큼 원하는 때 잠깐이라도 쉴 수 있겠으나 직장에서 새벽 4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아닌가. 걔는 나와 통화하기 전에 ‘일타 스캔들’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했다. 최근에 ‘재벌집 막내아들’과 ‘더 글로리’를 거쳐서 거기까지 갔다.


미드만 보는 나로서는 한드의 끝판왕인 걔가 조금 신기했으나, 언젠가 광고계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걔에게는 한드를 비롯한 문화와 유행에 빠삭해야 할 필요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걸 의도하고 보는 것은 아니더라도. 정말 피곤한데 요즘 늦게까지 일해서 일찍 잠이 오지 않는다는 w와 삶에 대해 또 얘기했다. 맨날 만나면 그런 얘기만 하는 enfj 둘이면서도, 우리는 매일 새롭고 다른 경험을 쌓고 있으므로 또 할 얘기들이 있었다.


그러다 걔가 삶이 정말 팍팍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둘다 크리스천이지만 그럼에도 삶이  자체로 풍요롭지 못하고  퍽퍽하다고 느낄 때가 있는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걔에게 인생이 퍽퍽한 스콘 같다고 했다. 딸기잼도 없이, 아메리카노도 없이 먹는 스콘이라고. 말도  되는 비유를 했다. 그러자 걔는 우리가 이렇게 이런 시간이 딸기잼 같은 거라고 했다. 그게 너무 어이없이 오글거리고 웃겨서 둘다 입을 막고 웃었다. 그리고 우리 둘다 조금은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일하다가 실수를 해도 ‘그게 뭐 죽을 일인가’ 하면서 털고 일어날 수 있도록.


얘랑은 웃음 포인트가 비슷하고, 살짝은 신도시 미시(피식대학)들 같은 말투도 비슷하고, 취향도 비슷하고, 먹성도 비슷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비슷함 때문에 자주 웃었다. 어쩜 이렇게 비슷하게 생각하고 움직이는지. 무슨 일이든 하기 위해 카페에 나가서 몇 시간씩 죽치고 앉아 있는 우리들. 이제는 그렇게 같이 카페에 앉아 있을 수는 없게 돼서, 나는 청주에 걔는 서울에서 살지만 어떻게든 시덥잖고 웃긴 딸기잼 같은 시간을 찾아서 보내는 게 또 웃기다.


페이스 타임으로라도 얼굴을 볼 시간이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맨날 쓸모 있어지고 싶어서 애를 쓰지만 가끔은 쓸모 없고 시덥잖은 말을 하는 게 얼마나 필요한지. 웃긴 얘기를 하다가도 진지해지고 진지한 얘기를 하다가도 웃기게 되는 게 정말 소중한 이완이 된다. 밤에는 한 시간씩 페이스 타임을 해도 아침이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조금은 어설퍼도 힘찬 우리들이 기특하고 대견한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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