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달랏)
우리가 방문한 5월의 달랏은 우기였다. 생각보다 많이 오지 않아 다니기엔 괜찮았지만. 냐짱에서는 그렇게 싫어하던 햇살도 달랏에선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날은 관광객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고원지대 마을의 차밭에 가기로 했다. 드넓게 펼쳐진 녹색바다 같은 차밭에서 싱그러운 차를 한잔 마시는 상상만으로 이미 마음은 풍선을 타고 두둥실 날아올랐다. 거기에 좋은 날씨라니! 보통은 그랩을 이용하여 다니던 우리도 오늘은 왠지 버스를 타고 산을 올라보고 싶었다. 진짜 로컬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던 것이다. 언제 올 줄 모르는 버스를 허름한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면서도 우리 부부는 신이 나서 조잘거렸다. 30분쯤 기다렸을까. 버스기자 아저씨에게 짧은 베트남어로 여러 번 목적지를 확인하고 버스에 올랐다. 달랏의 어르신들이 가득한 버스였다. 우리나라의 시골버스처럼 새로 타는 승객들과 앉아있는 승객들 모두 아는 사람인 듯 수다를 이어갔다. 우렁찬 목소리의 할머니를 선두로 기사님과 승객들 모두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왁자지껄 나누었다. 우리는 그 수다를 배경음악 삼아 창밖풍경을 내다보았다. 100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던 달랏의 풍경은 베트남의 다른 지역보다 훨씬 이국적인 느낌을 주었다. 동유럽의 작은 마을 포르투를 닮은 것 같은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배경이 나의 눈을 행복하게 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고원지대에 있는 차밭을 향해 구불구불 오르막길을 한참 오르는 중 맑았던 하늘이 점점 어두컴컴해지더니 이내 우르르쾅 날카롭게 하늘을 찢는 벼락과 함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때 황당한 기분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우리가 버스에 내릴 쯤에도 비는 잦아들지 않았다. ‘아.. 오늘 망했다.’ 착잡한 마음으로 한 바퀴만 돌아보고 가려고 우산을 쓰고 저벅저벅 흙길을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도 아니었기에 동네 주민 이외의 단 한 명의 관광객도 없는 스산한 차밭이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아침부터 ‘오늘은 인생사진 찍어야지’ 하며 기대하고 도착한 곳이 이렇게 스산하고 우중충하다니... “그나저나 우리 어떻게 내려가지?” 으쓱한 풍경을 돌아보다 갑자기 걱정이 몰려왔다.
굽이굽이 한참을 올라간 산길에 세찬비까지 오는 날 그랩이 잡힐 리가 없었다. 산길을 내려가다 보면 무슨 방법이 있지 않을까. 우리는 비 오는 산길을 내려가다가 아까 내린 버스정류장 맞은편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간판도 없는 그 작은 공간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재배한 찻잎으로 우려낸 차를 파는 곳이었다. 정갈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와 순박한 미소를 가진 아주머니에게 차가 얼마냐고 물었다.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말간 웃음을 지으며 차는 100원이라고 했다. 100원? 아무리 물가가 저렴한 곳이라지만 한 번도 본 적 없는 가격에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확인해 보아도, 가격은 100원이었다. 100원짜리 차 맛은 어땠을까? 싼 게 비지덕이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는 나지만, 그날만큼은 예외였다. 향긋하고 신선한 차의 감칠맛이 일품인 제대로 된 차였다. 그 평온한 분위기와 차 맛에 잠시 마음이 노곤해질 찰나 저 위에서 내려오던 버스가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가고 있었다. “어 저거 놓치면 우리 집에 못 가는데” 깜짝 놀라며 뛰어나가려는데 찻집아주 네가 얼마나 민첩했는지 우리보다 쏜살같이 뛰어나가 버스를 따라잡았다. 왜소한 체격의 앙상한 팔을 휘저으며 쩌렁쩌렁한 베트남어로 아저씨를 불러 세웠다. 끽- 아줌마를 본 버스는 그 자리에 세웠고, 우리는 가까스로 뛰어가 버스를 탈 수 있었다. 허겁지겁 버스를 타느라 감사하는 말도 제대로 하지도 못했는데.. 버스 찻장밖으로 아주머니니는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원래 가격이 100원이 아니었던 거 같지?”
“응. 우리가 민망할까 봐 그냥 받으신 거 같아. 근데 왜 그러셨을까?”
대부분의 여행지에서 우리는 돈을 주는 만큼의 친절을 받는다. 그러나 그날의 친절은 100원짜리 서비스가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잘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날의 그 이유 없는 친절이 낯선 달랏 땅을 좋아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저 아주머니와 다시 볼일이 있을까. 아마 못 볼 가능성이 훨씬 높을 것이다. 다시는 볼일 없는 낯선 외국인 여행자를 향해 자신의 일처럼 나서 주었던 그 환대, 머릿속 사진기에 찰칵 남긴 그 아주머니의 모습은 이따금씩 떠올라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어쩌면 모든 여행의 순간, 잠시 머물다가는 관광지에서 조차 그곳 사람의 삶을 받아들이고 연결되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었는 지도 모르겠다.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곳이지만 그곳 사람들의 온기를 느끼고 싶은 갈증에 늘 목말라 있었을지도..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햇살을 맞대며 살아온 카페아주머니의 순수한 배려는 나의 그런 갈증을 촉촉하게 채워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