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커피와 사랑 (feat 달랏커피농장 체험기)

by Grace

“ 베트남이 3대 커피 생산지인 거 알아? ”


남편은 커피에 진심이다. 늘 맛있는 원두를 찾고, 항상 마신다. 반면에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고, 별로 관심도 없다. "풍경이 엄청 예쁘데" 남편의 꼬임에 못 이기는 척 같이 커피농장을 체험하기로 했다. 그는 드디어 마시기만 하던 커피열매를 직접 보고 로스팅할 생각에 들떠 보였다. 우리는 그랩을 타고 달랏 외곽의 고원지대에 있는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언제 도착해..?" 산을 아무리 오르고 올라도 도착하지 않는 그 길에 우리는 무섭기도 했다. 차에서 내린 순간 그곳은 멍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눈부신 녹색의 드넒은 산이 그림처럼 펼쳐진, 마치 스위스의 한 산속에 있는 것 같은 풍경이었다. 기대하지도 않은 풍경에 우리는 오길 잘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만으로도., 우리가 그곳에 가 있는 것이 충분했다.

가슴을 울리는 아름다움을 보았을 때, 찰나적인 순간이지만 깊이깊이 남아 오래오래 기억된다.






농장의 풍경





잭푸르트 열매


다행스럽게도 우리가 만난 호스트는 열정이 대단했다. 그는 몇 년 전 농장에 들어와 강아지 고양이를 키우며 잭푸르트에 커피까지 모든 것을 유기농용법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땡볕을 맡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농사노하우와 재배과정을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기대보다 재미있었던 체험이 끝나고 잠시 쉬는 동안 베트남호스트의 친구인 인도계 미국인 도우미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개구쟁이 같이 유머러스하면서도 젠틀한 매너를 가진 친구였다.



우리 잠깐 래크레이셔 해볼래요? 둘이 부부 맞죠?
당신의 사랑의 언어는 무엇입니까?

'지금 이 상황에 사랑이야기?'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하며 다소 황당했지만, 그는 진지하게 물었다.

사랑의 언어는 1. 인정하는 말 2. 함께하는 시간 3. 선물 4. 헌신 5. 신체적 접촉

이렇게 5가지가 있다는 설명을 덧붙이며, 1.2.3위까지 말해보자고 제안했다.

남편과도 해보지 못한 철학적 질문을 낯선 곳에서 낯선 친구에게 들으니 웃기기도 하면서도 남편의 대답에 묘한 호기심이 생겼다.


"제 사랑의 언어 1순위는 인정하는 말이에요"


엥? 직접 들으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답변이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자기 생각을 또박또박 진지하게 설명하는 남편을 보며 평소 내 언어생활을 떠올려보게 되었다.


나는 지적을 잘하는 선생님 같은 스타일이다.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면서 마음에 안 들 때면 잔소리를 했고, 이건 객관적 사실이라면서 기분 나쁠만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기도 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콕찝어 이야기하는 것이 서로의 관계를 위해 더욱 필요하다며 그의 기분을 살피지 않은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러면서도 그의 좋은 행동에는 격려나 칭찬보다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무심함이 그의 마음에는 서운함으로 남아 있을 터였다. 내가 원하는 틀에 맞는 모습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어쩌면 그를 위축되고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반면 그는 아주 낯간지러운 말도 스스럼없이 했고 , 닭살 돋고 느끼하다고 생각하는 애정 표현과 격려도 아낌없이 해주는 사람이었다. 원래 그런 사람인가 보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사실 자기가 듣고 싶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말들을 나에게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사랑의 언어는 제1위는 봉사였다. 남편 또한 '아 그랬어..?'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설거지도 안 해주면서 무슨 사랑타령이야' 남편의 애정 어린 말을 들으면 나는 늘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늘 행동이 말을 대신한다고 믿는 현실적인 사람이라 그런지 칭찬이나 애정표현을 하는 것은 영 서투르고 부끄러웠다. 나는 무뚝뚝한 옛날 아버지 같은 투박한 부인이었다.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길 바라는 현실주의자인 나, 한마디 칭찬에도 춤추는 고래 같은 남편.

우리는 결혼 5년이 다돼 가도록 서로의 사랑의 언어를 잘 모르고 있었다.


사랑이란 당신이 본래의 모습으로 되찾도록 돕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생텍쥐베리


더 툴툴대고 정확하게 쏘아붙이면 내 말을 더 잘 들어준다고 생각했던 일상에서의 나와 기분이 상해 버린 남편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도 자주 서운했고, 이해가 가지 않아서 사소한 일로 다투기도 했다. 그간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열심히 사랑한다고 말해왔던 걸까. 부부이기 이전에 우리는 완전한 타인이었다. 이 당연한 사실을 이 낯선 땅에서 느끼다니.. 참 아이러니했지만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우리에겐 서로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뀌길 바라는 조각가의 눈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눈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늘 함께 있기에 더욱더 고유한 아름다음과 개성을 존중해야 하는 사이임을.


그날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산의 풍경은 상상도 못 할 만큼 아름다웠다. 생전 처음 커피 열매를 구경하며, 커피가 어떻게 재배되고 만들어지는지 구경했고, 늘 먹기만 하던 잭푸르트열매도 실제로 보았다. 내가 속속들이 다 안다고 생각했던 남편의 사랑의 언어도 알게 되었다. 새로운 곳에서 우리는 늘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서로가 조금은 낯설었다. 달콤 쌉싸름한 커피 향과 함께 엉뚱하지만 로맨틱한 대화를 나누며 서로를 조금 더 배워갔다. 사랑과 커피 두 가지를 배운 셈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낯선 곳이 좋아지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