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모든 좋은 것들은 우연이었다.

말라카 가는 길

by Grace


버스를 놓쳤다. 고개를 저으며 버스가 떠났다고 말하는 버스 승차원의 민망한 미소와 함께 나는 남편에게 눈을 흘겼다. 그날은 쿠알라룸푸르의 역사적인 도시 말라카를 가는 날이었다. 남편은 어젯밤 늦게까지 차편을 고르고 예약했다. “ 내가 겨우겨우 찾아서 제일 좋은 버스를 예약했어. 원래 표를 사려면 한참 기다려야 하는데 우리는 큐알코드로 찍기만 하면 바로 탈 수 있는 버스야. 누울 수도 있고, 배터리 충전도 할 수 있어” 남편은 뿌듯하게 말했다. 그의 의기양양함과 여유가 뭔지 모르게 불안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여유로운 남편은 출발 10분 전까지도 편의점에 버스에서 먹을 과자를 골랐다, 우리가 예매한 버스는 줄 서서 기다릴 필요가 없어서 괜찮다며 빨리 가자고 보채는 나를 달랬다. 출발 5분 전, 이제 큐알코드를 찍고 승차하러 들어가려는데 자동으로 열려야 하는 문이 열리지 않았다. 승무원은 무조건 종이로 된 표가 있어야만 한다며 엄격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우리를 돌려보냈다. 결국 우리는 버스티켓을 사기 위해 줄을 서야 했고, 누을 수 있고, 충전기도 있는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이런 일은 여행에서는 일상적이다. 그런 순간이면 잘잘못 지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 일인지는 서로 잘 알고 있었기에 재빨리 다음 버스를 예약했다. 그런데 그날은 나도 모르게 총알처럼 한마디 쏘아붙였다. “ 처음 가보는 길인데 좀 더 제대로 알아봤어야지!”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로 출발해 극도로 배가 고파서 예민한 상태였다.


쿠알라룸푸르에서 말라카 까지는 통상 2시간에서 3시간 안에 도착한다. 12시에 버스를 타면 빠르면 2시면 도착할 것이다. ‘그래. 한 시간 기다렸다가 맛있는 점심 먹어야지 ’ 애써 마음을 달래며 다음버스를 탔다. 그런데 넉넉잡아 3시간이면 도착한다는 버스가 무슨 일인지 도로에 갇혀 4시간을 옴짝달싹 하지 못했다. 분명 뭔가가 잘못됐다. 알아보니 하필 오늘 말라카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난 것이다. 언제도 착한지 기약도 없는 버스, 꼬르륵 거리는 배.. 현기증이 나고 남편을 향한 원망이 다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 답답한 버스 안에서 나는 만약 놀이를 시작했다.

만약 남편이 큐알코드 표를 예매하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때 과자를 사러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만약 도로에 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지금 쯤 나는 말라카의 화려한 도시를 걸으며 수박 주스를 마시고 있을 시간이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오늘 삶에 벌어진 작은 일이 우리의 하루의 모든 계획을 바꿔놓은 것이다.

버스에서 내린 시간은 오후 5시. 하루종일 쫄쫄 굶어 배가 고픈 나머지 원래 가려던 식당은 찾아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타코 집에 들어갔다. 오랜 배고픔에 서러웠던 나는 정말 어린애처럼 허겁지겁 타코를 먹고, 라임이 들어간 상큼한 음료수도 벌컥벌컥 마셨다. 화를 낼 힘도 없었다. “근데 이 타코집 혹시 미슐랭 아니야..? 서둘러 들어간 식당에서 먹은 타코는 가성비 맛집이었다. 눈물 나게 맛있었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맛있는 걸 먹으니 기분이 좋아지는 단순한 사람들인 우리는 다시 까르르 장난 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나오자 말라카는 여전히 뜨거웠지만, 한낮의 더위가 살짝은 물러나 해가 반쯤 구름에 가려진 오렌지빛 하늘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리를 둘러싼 색깔이 바뀌고, 이제 막 야시장이 문을 열며 그날의 하이라이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말라카의 야시장에 싱싱한 해산물과 광장 앞 호수





우리는 큰 수박 속을 통째로 간 달콤한 수박주스를 마시며 계획도 없이 걸었다. 핸드폰 배터리가 없어서 어디를 가야 하는지 길을 찾아볼 수도 없었기에 발길이 닿는 곳으로 향했다,

휘황찬란한 음식들과 수많은 인파의 사람들을 바라보니 정신이 쏙 빠질 거 같으면서도 그 생생하고 이국적인 분위기에 살짝 취한 듯 기분이 좋아졌다.

화려한 손기술로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사람. 뜨거운 불 앞에서 자글자글 구워지는 맛있는 꼬치들, 큼지막한 조개와 처음 보는 해산물들.. 신나게 두리번두리번거리며 거리를 거닐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가 원래 계획했던 시간에 도착했다면, 너무 더워서 이렇게 걷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벌써 지쳐서 말라카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야시장은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계획한 음식점에 갔었다면 이렇게 맛있는 인생타코를 평생 못 먹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지금 오지 않았다면, 이 오렌지빛 하늘과 생기 넘치는 지금 이 순간을 인생에 맞이하지 못했으리라.



행복과 자유는 한 가지 원칙을 분명히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

바로 어떤 것은 내 통제하에 있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철학자 에픽테토스-



여행을 하며 느끼는 가장 큰 것은 모든 상황은 계획대로 글러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여행을 하며 예측하지 못한 순간은 당황스럽고 화나간다. 잘못된 선택을 한 서로를 탓하거나 짜증을 낼 이유도 충분히 타당하다. 그때 숨을 크게 내쉰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지금 내 옆에 존재하는 가끔은 사랑스러운 남편을 바라본다. 내 삶에 이미 일어난 사건과 상황은 어쩔 수 없지만 동시에 나의 여행은 계속된다. 그 상황도 잘 찾아보면 좋은 것이 있다. 투덜거리다가 놓치게 될 그 순간 허락된 작은 행복들을 투덜 버림으로 날려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여행의 좋았던 많은 순간 내가 계획했던 상황이 대부분은 우연히 펼쳐진 상황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렇다. 모든 좋은 순간은 우연이었다. 그리고 선물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누군가의 짐을 든다는 것